지엄(智嚴)은 1464년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성은 송(宋)씨이고, 법호는 야로(埜老, 野老), 당호는 벽송(碧松)이다. 아버지는 복생(福生)이며, 어머니는 왕(王)씨이다.
지엄은 1491년(성종 22) 5월 북방 여진족을 토벌할 때 도원수 허종(許琮)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크게 세웠다. 그러나 마음을 닦지 않고 전장을 쫓아다니는 것이 헛된 이름만 추구하는 것임을 깨닫고, 28세에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에서 조징(祖澄)에게 출가하였다. 그 뒤 선정(禪定)에 힘쓰다가 연희(衍熙) 교사를 찾아가 원돈교(圓頓敎)의 뜻을 묻고 『능엄경』을 배웠다. 이후 정심(正心) 선사로부터 선(禪)의 법을 전해 받았다.
지엄은 1508년(중종 3) 가을,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에서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拘子無佛性]’는 화두(話頭)를 통해 깨우침을 얻었다. 또 『고봉어록(高峯語錄)』의 '양재타방(颺在他方)'이라는 문구를 보고 찾아야 할 본분사는 따로 있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지엄은 1511년 봄에 용문산에 들어갔다가 2년 후 오대산으로 옮겼고, 다시 백운산, 능가산 등 여러 산을 둘아다니며 도를 닦았다. 1520년에 지리산에 들어간 후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수행과 연구에 매진했다. 그 뒤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경성 일선(慶聖一禪, 1488∼1568) 등 제자 60여 명에게 대승(大乘)의 경론(經論)과 참선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먼저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와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으로 초학자들을 지도하여 지식과 견문을 깨치게 하고, 다음으로 고봉과 대혜의 『어록』으로 지해(知解)의 병, 소위 '알음앓이'을 제거해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러한 지엄의 교육 방식은 조선 후기 강원(講院) 이력 과정의 사집과(四集科) 교재의 시작이 되었다.
지엄은 '도를 배우려면 먼저 경전을 깊이 연구해야 하지만 경전은 오직 내 마음 속에 있다'라고 하여 교학을 익힌 뒤 조사선(祖師禪)의 경절문(徑截門)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조사선을 연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여러 경전들을 보다가 여가에는 정토왕생을 바라고 구한다'라는 종합적 수행 방식을 제시했다.
지엄은 1534년 지리산 수국암(壽國庵)에서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방편품(方便品)의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라는 구절에 이르자, 제자들에게 밖에서 구하지 말고 힘써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입적하였다. 당시 세수 70세, 법랍 44세였다. 저서로는 가송(歌頌) 50수를 엮은 『벽송당야로송(碧松堂野老頌)』 1권이 있다.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은 조사인 벽송 지엄이 간화선을 주장한 송의 대혜 종고(大慧宗杲)와 원의 고봉 원묘(高峰原妙)를 멀리 이었다고 하였다. 휴정은 '대사가 해외의 사람으로서 500년 전의 종파를 비밀스럽게 이었으니 이는 정주(程朱)의 무리가 천년 뒤에 나와 공자와 맹자의 계통을 멀리 이은 것과 같다. 도를 전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마찬가지이다'라고 정리하였었다. 한편 휴정의 제자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는 1625년부터 1640년까지 '임제태고법통설'을 제기했는데, 이는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원의 석옥 청공(石屋淸珙)으로부터 전해 받은 임제종의 법맥이 이후 정심, 지엄, 영관을 거쳐 휴정 등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