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자는 입지(立之), 호는 동고(東皐)이다. 만년에 당호(堂號)를 간이(簡易)라 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최자양(崔自陽)이다.
최립은 개성의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나 문장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시의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글씨의 석봉(石峯) 한호(韓濩)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다.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됐고 1559년(명종 14)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여러 외직을 지낸 뒤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선조 14) 재령 군수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에 힘써 임금으로부터 옷감을 받았다. 그 해에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최립은 1584년(선조 17)에 호군(護軍)으로 이문 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1592년(선조 25)에 공주 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전주 부윤을 거쳐 승문원 제조를 지냈다. 그 해에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주청 부사(奏請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선조34)에는 평양(平壤)에 간이당(簡易堂)을 짓고 그곳에서 자적(自適)하였다. 최립이 간성군수로 있던 1603년 8월에 한호(韓濩)도 흡곡 현령(歙谷縣令)으로 나가 최립과 왕래하였다. 이때 최립은 금강산을 갔다와서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지었다. 그후 최립은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1606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 참판에 이르러 사직했다. 그리고 평양에 은거했다.
최립은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에 중국 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하였으며, 그곳의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초(草) · 목(木) · 화(花) · 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다. 최립은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에게 시를 배워 품격이 호걸스러우며 음색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역학(易學)에 심오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의 2권의 저서가 있다. 사람들은 최립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는데, 최립이 시보다 글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문장가로서 최립은 사명 문자(詞命文字)에 종사하는 일 외에도, 비지류(碑誌類)ㆍ전장류(傳狀類)ㆍ서발류(序跋類)ㆍ기서류(記序類)의 사사로운 문자를 요청받는 일이 많았다. 그는 초고를 서너 번씩 바꾸면서 ‘각의담사(刻意湛思)’를 하여 글을 내었는데, 그의 비지류 문장은 고아(古雅)하고 경건(勁健)한 맛이 있다.
최립은 문장을 지을 때 ‘고문(古文)’의 격식을 따르고자 힘썼고, 그의 문장은 일시를 풍미했다. 윤근수와 함께 ‘고문’을 숭상하여, 당대 문단의 분위기를 바꾸었다는 평을 받는다. 고문의 형식미를 추구하여 나름대로 ‘억세고 헌걸찬[悍杰]’ 풍격을 이루어, 이전의 평담한 문풍을 변혁시켰다.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문장을 따라 예스럽고 우아하며 간결하고 법도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최립의 글에는 이러한 특징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고문사(古文詞)라고 불렀다.
문집으로는 『간이집』이 있고, 시학서(詩學書)로는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