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였던 김경희(金景熹)가 건립한 것으로,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이곳 고향으로 낙향하여 취석정을 짓고, 시문과 산수를 즐겼다.
현재의 건물은 1871년(고종 8)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취석’이라는 이름은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바위의 모습 또한 자연스러워 마치 취한 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바위의 한쪽에는 ‘醉石亭’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2고주 5량집 구조이다. 정면과 측면을 각각 3칸으로 만들어 모두 9칸인데, 가운데 1칸을 방으로 꾸미고, 주변은 마루를 둘렀다. 출입은 양 측면에 섬돌을 하나씩 두고 이를 통해 오르도록 하였는데, 마룻바닥 주위에는 4면으로 연잎을 조각한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하였다.
하엽에는 태극(太極)과 팔괘(八卦)를 조각해 장식으로 삼고 있다. 마룻바닥은 지면에서 1자 반 정도 높여 우물마루를 깔아 만들었다.
기단은 생략하고 커다란 자연석으로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원주와 방주를 혼용하였다. 외진주(外陣柱)는 원주이고, 방의 사방에 세운 기둥은 방주이다.
기둥머리에서는 창방을 기둥 사이에 걸고 주두(柱頭)를 놓은 다음, 그 위에 장여와 주심도리를 걸었다. 주심도리는 단면이 굵은 굴도리를 사용했다. 창방과 장여 사이는 조금 사이를 띄워 소로를 2∼3개씩 끼웠다.
가운뎃방의 창호는 모두 띠살문을 달았는데 전후면은 2분합문이고, 양 측면에는 3분합문을 달았다. 방의 천장은 반자로 하고 마루는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으로 처리하였다.
건물을 제외한 주변의 바위와 담, 그리고 수목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꾸민 데 비하여 건물은 대칭으로 만들어 인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어우러지려는 의도가 보인다.
즉, 가운데에 폐쇄가 가능한 방을 배치하고, 이 방을 에워싸는 마루는 창호를 달지 않아 개방된 공간이 된다. 내부의 방과 외부의 자연공간이 마루공간으로 완충되도록 계획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