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 삼거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4대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합장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합장릉
건립 시기
975년(광종 26)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광종|대목왕후
높이
126㎝
지름
640㎝
소재지
개성특별시 삼거리
내용 요약

헌릉(憲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삼거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4대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합장릉이다. 광종은 975년 5월, 51세의 나이로 사후 송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헌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헌릉은 매봉 뒤 동쪽 골짜기의 높지 않은 언덕에 있으며 북한 보존급유적이다. 고려시대에 헌릉은 산직당상 4명이 관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소홀하였지만, 1662년에도 정자각이나 석물이 유존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조사를 통해 능제와 구조 및 석물이 조사되었으나, 현재는 상당수 석물들이 유실되어 남은 것이 많지 않은 상태이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삼거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4대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합장릉.
건립경위

광종(光宗, 925~975, 재위 949~975) 왕소(王昭)는 태조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이며, 정종의 아우이다. 비는 태조의 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지만 근친혼을 한 경우이다.

956년(광종 7) 노비안검법을 만들고, 958년(광종 9)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관리들을 선발하고, 주1의 관복제도를 제정하며 문물 풍속을 일정하게 바로잡으려 하였다. 재위 26년인 975년(광종 26) 5월 예고 없이 주2에서 51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이곳에 묻혔다.

변천

광종과 대목왕후의 합장릉인 헌릉은 개성특별시 삼거리 소재지에서 박연폭포 쪽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매봉 뒤 동쪽 골짜기의 높지 않은 언덕에 있다.

고려시대에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를 설치하여 담당하였다. 특히 인종 대에는 왕릉이나 왕후릉을 수호하기 위해 산직장상(散職將相)이라는 위숙군(圍宿軍)을 두어 능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 고려사』 「위숙군조」를 보면 위숙군의 숫자는 능마다 달랐다. 광종 헌릉에는 산직당상 4명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추존 세조의 창릉 이외에 왕후릉에는 모두 2명을 배치했던 것보다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소홀하였는데,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43기의 고려왕릉 중 적유현(狄踰峴)에 헌릉이 있다고 하였다. 1662년(현종 3) 헌릉은 능토의 태반이 훼손되고 수목이 무성하였지만 주3이나 주4주5의 돌이 주6하고 있다고 기록하였지만, 이곳을 조사하면서 헌릉인지는 불분명하다고 언급하였다.

1818년(순조 18)에는 개성 41기와 기타 지역 16기로 고려왕릉 57기, 1867년(고종 4)에도 57기의 고려왕릉에 표석을 세웠다. 이를 토대로 1910년 조선총독부에서 고려왕릉을 조사하였고 1916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고고학적 조사를 하여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에 53기의 왕릉을 표시하였다.

형태와 특징

헌릉은 매봉 뒤 동쪽 골짜기의 높지 않은 산중턱 경사면에 서북향으로 놓여 있는데, 3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헌릉의 능역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1단에서 150㎝ 내려간 중계와의 사이 양쪽에는 180㎝의 돌난간을 좌우 양쪽 끝에 두어 연결하고 제2단의 좌우를 통과하여 제3단으로 그대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제2단의 길이는 250㎝이다. 능역(陵域)은 폭 144㎝, 길이 약 390㎝의 주7이고, 뒤쪽에는 동쪽과 서쪽 및 뒤쪽에 곡담을 쌓았던 흔적이 있다. 봉토의 높이는 126㎝, 직경은 640㎝이다.

봉분은 12각 주8을 두르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주9이 부조되어 있었다. 현재는 병풍석의 원석이 무너진 곳을 잡석으로 보충해 넣었다. 병풍석의 바깥으로는 망주형의 석난간 기둥 몇 개가 남아 전하고 있다. 헌릉의 주위 네 모서리에는 주10 4마리가 바깥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망주석(望柱石)주11장명등(長明燈)이 있었으나, 현재 이것들은 유존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2단에는 석인이 1쌍 있었고, 머리 부분에 주12을 쓴 석인의 파편 1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석인 1쌍은 존재하지 않고, 남쪽 숲에서 양관을 쓴 정교한 석인의 머리 부분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3단에는 1867년(고종 4)에 세운 표석이 현존하고 있고, 120㎝ 석축을 쌓고 한 단 내려간 곳에는 정자각을 쌓았던 주춧돌이 남아 있어 정자각의 원래 위치를 알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광종과 대목왕후의 헌릉은 석물들의 훼손이 심한 편이나 3단의 구조와 능의 축대나 초석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고려왕릉의 능제와 구조의 원형을 보여 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조선향토대백과』(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 · 한국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16)

논문

박형열, 「고려왕릉의 특징과 변천」(『고고학』 제20권 제1호, 2021)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호 제1호, 2021)
장호수, 「개성지역 고려왕릉」(『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혜안, 2000)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모든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2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    우리말샘

주3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4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5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6

후세에 남아 보존됨. 또는 후세에 남기어 보존함.    우리말샘

주7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8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9

십이지를 상징하며 각각 방향과 시간을 맡아 지키고 보호하는 열두 가지 동물의 상(像). 대개 같은 모양의 관복을 입고 머리만 동물 모양을 하고 있는데, 능이나 묘의 둘레돌에 조각되거나 관이 들어 있는 방의 내부에 벽화로 그려져 분묘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우리말샘

주10

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石物)의 하나. 무덤을 지키게 할 목적으로 무덤 속에 넣거나 무덤 주위에 세운다.    우리말샘

주11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    우리말샘

주12

문무관이 조복(朝服)을 입을 때에 쓰던 관. 징두리의 앞이마 위의 양(梁)만 검은빛이고 그 외에는 모두 금빛이다.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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