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 ()

홍대용의 담헌연기 중 권수면
홍대용의 담헌연기 중 권수면
과학기술
인물
조선 후기에, 과학사상가로서 『담헌서』, 『의산문답』, 「연기」 등을 저술하였으며,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의 학자 및 서양의 선교사들과 교유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영향을 받은 학자.
이칭
덕보(德保)
홍지(弘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1년(영조 7)
사망 연도
1783년(정조 7)
본관
남양(南陽)
내용 요약

홍대용은 조선후기 『담헌서』, 『의산문답』, 「연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31년(영조 7년)에 태어나 1783년(정조 7년)에 사망했다. 수차례 과거에 실패한 뒤 음보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과학사상가로서 유명하다.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을 방문해 중국의 학자·서양선교사들과 교유하면서 서양문물에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 지구자전설·우주무한론에서 시작한 그의 사상은 화이론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생명론과 신분계급의 타파·교육기회균등 주장으로 이어졌다.

정의
조선 후기에, 과학사상가로서 『담헌서』, 『의산문답』, 「연기」 등을 저술하였으며,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의 학자 및 서양의 선교사들과 교유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영향을 받은 학자.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사간 홍용조(洪龍祚)의 손자이며, 목사(牧使) 홍역(洪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풍(淸風) 김씨 군수 김방(金枋)의 딸이고, 부인은 이홍중(李弘重)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특히,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주1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그의 활약은 이런 관직과 관련된 것이기보다는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 · 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이 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筠) · 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醫山問答)』 역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전설 · 생명관 · 우주무한론으로 전개되는 홍대용의 자연사상은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일관된 것으로, 이와 같은 상대주의는 그의 사회사상에 연장, 발전된다.

첫째,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쪽이 화(華)이고, 어느 쪽이 이(夷)일 수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한다.

둘째,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과거의 인본적(人本的)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것으로 상대화하였다.

셋째, 그는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과학사상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 등은 상당한 독창성을 보이고 있지만, 서양 과학과 도교적인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썼으며, 여러 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농수각(籠水閣)이라는 관측소에 보관하기까지 하였다.

홍대용의 사상 속에는 근대 서양 과학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 또 근대적 합리주의와 도교의 신비사상, 그리고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우주무한론 등이 때로는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섞여 있는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였다.

참고문헌

『담헌서(湛軒書)』
『홍대용과 그의 시대』(김태준, 일지사, 1982)
「홍대용(洪大容)의 과학사상」(박성래, 『한국학보』 23, 1981)
「홍대용(洪大容)의 실학사상」(천관우, 『문리대학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1958)
주석
주1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박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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