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회(季會). 이상(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0x9C4D)이고, 아버지는 감사 주삼(柱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문량(李文諒)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09년(숙종 35) 사서로 근무 도중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은택을 입었고, 특히 시를 잘 써 호당(湖堂)에서 이름이 높았다. 1710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고향에 내려 가서 3삭(三朔)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사헌부 탄핵으로 체차(遞差)되었다.
그 뒤 1713년(숙종 39)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고,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나 1717년(숙종 43) 영남 유생(儒生)들의 파장(罷場) 등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이어 고묘(告廟)의 의견을 달리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우의정 조태채(趙泰采) 등을 지척(指斥)하다 오히려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고, 정언(正言) 김려(金礪)의 탄핵으로 울산부(蔚山府)에 귀양갔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하자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부름을 받았고, 이어 부교리(副校理)·겸사서(兼司書)·검상(檢詳)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