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방유적은 국경의 방비를 위하여 내륙이나 해안 또는 섬에 설치하는 보(堡)나 진(鎭), 목책(木柵), 수책(水柵), 포(浦), 포영(浦營), 행영(行營), 성(城) 등의 군사적 목적의 요새 시설이다. 국경지대나 해안의 요충지에 설치하여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성벽과 우물 또는 샘과, 연못 등을 갖추고 있으며, 군창(軍倉)을 두거나 봉수를 갖추어 유사시 긴박한 상황을 즉각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 이민족의 침입이 많았던 북계 지역과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관방유적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한다. 즉, 백제 진사왕 2년(386) 국내의 15세 이상의 사람을 징발하여 관방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 개성 부근)에서 시작하여 북쪽은 팔곤성(八坤城), 서쪽은 바다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방 축조의 목적이나 규모, 형태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당시 백제로서는 개성 부근에서 서해에 이르는 지역이 북쪽의 고구려와 관련하여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축조된 한산주의 주장성(晝長城)이나 흥덕왕(興德王) 4년(829)의 당은군(唐恩郡)을 당성진(唐城鎭)으로 삼은 일, 문성왕(文聖王) 6년(844) 혈구진(血口鎭)을 설치한 것 등은 통일신라의 중요한 관방시설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종(成宗) 대에 이르러 관방의 명칭을 고치고 새롭게 설치하여 국경의 방비를 견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관방 설치는 북방의 여진족 등 주변의 방해로 수월하지 않았다. 즉 성종 3년(984)에 처음 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 ?∼?)에게 명하여 압록강 강안에 성을 쌓아 관방을 설치하게 하였으나 여진이 군사를 일으켜 방해하였고, 성종 16년(997)에 관방을 절령으로 옮기려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종(德宗)은 2년(1033)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 ?∼1038)로 하여금 북쪽 경계에 관방을 처음으로 설치하게 하였다. 서해 해변에 있는 옛 국내성 경계에서 압록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을 기점으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덕, 영삭, 운주, 안수, 청새, 평로, 영원, 정융, 맹주, 삭주 등 14개의 성을 걸쳐 요덕, 정변, 화주 등 3성에 다달아 동쪽 바다의 함흥 도련포까지 이르는 1천 여리의 석축을 25척(尺) 규모로 쌓았다. 이 고장성(古長城) 즉, 천리장성을 중요한 관방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왕실은 지속적으로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자 하였다. 특히 예종(睿宗) 12년(1117)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관방을 설치하면서 백관이 올린 표문(表文)에 그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표문에는 압록강 일대가 신라의 옛 지역으로서 조상 때부터 우리나라의 관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엽의 쇠퇴로 인하여 요(遼)나라에 침략을 당하였으나 이는 다만 백성의 분노를 자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귀신도 부끄러워하였던 것이며, 우리의 일초일목이 다 다시 내지(內地)로 들어왔으니 여기에 농업을 장려하고 국토를 확대하게 되었다고 하여 압록강 특히 의주(義州) 지역을 오랫동안 고려의 영토로 여겼으며, 국가의 중요한 관방지역으로 지극한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함경도, 평안도 등 북변의 경계지역 뿐만 아니라 강원도,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의 해안에 행영, 진, 보, 책, 성 등을 관방시설로 축조하였다. 특히 서북 4군과 동북 6진을 개척한 조선 초부터 중종(中宗) 때에 이르기까지 북변의 방어를 위한 관방의 재편, 또는 이동이 빈번함에 따라 많은 축성이 이루어졌다.
특히, 중종대의 정덕(正德) 연간(1506∼1521)에는 대대적으로 관방이 축조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성곽과 봉수 이외에 관방을 별도로 기록하여 관방의 중요성을 나타내었다. 한편, 제주도의 경우에는 방호소(防護所)와 수전소(水戰所)라는 특별한 명칭을 두었다. 이중에서 수전소는 공납과 선물(膳物)이 출항하는 곳으로서 전선(戰船)이 배치되었다.
관방유적은 기록상으로 백제가 북방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쌓은 청목령(靑木嶺)∼서해에 이르는 장성이 가장 앞선다. 이후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았고, 신라는 패강(浿江)장성과 동북장성, 그리고 관문성(關門城)을 축조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압록강 입구부터 동해안의 정평(定平)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이들 장성은 산성들을 연결하는 구조로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 때 압록강과 두만강 방면의 행성의 축조나 전라남도 고흥의 흥양현(興陽縣)에 쌓았던 백석포장성(白石浦長城), 풍안평장성(豊安坪長城)등으로 이어지는 등 역시 후대까지 계속되었다.
관방의 시설물로는 성벽과 우물 또는 샘과, 연못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규모가 크거나 중요한 곳에는 군창(軍倉)을 두기도 하였다. 울산부 좌도병마절도사영의 경우 군창을 비롯하여 근융루(菫戎樓), 선위각(宣威閣), 조연고(組練庫) 등이 있었다. 또한 함경도의 동관진처럼 중요한 관방에는 봉수를 갖추어 유사시에 즉각 긴박한 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수군의 경우 수군절도사영(營), 진(鎭), 영(營), 수(戍), 보(堡) 등 해안 지역의 관방은 그 급에 따라 담당 관직의 차이가 있다. 수군절도사영에는 정3품의 절도사(節度使)와 부관인 정4품의 우후(虞侯)가 파견되었는데 절도사영의 경우 읍성 내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진의 경우 종3품의 절제사(節制使) 또는 첨사(僉使), 영은 종 4품의 만호(萬戶) 1인의 관할에 두었다.
수는 대체로 작은 섬에 설치한 관방 방비하는 파견대를 말한다. 영의 만호 관할에 두거나 수어군(守禦軍)을 배치하였는데, 옹진의 관량수(館梁戌)의 경우처럼 수어군(戍禦軍)이라고도 하였다.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경우는 충청남도 서산의 요아량수처럼 수군첨절도사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는데 때때로 보와 마찬가지로 종9품 무관인 권관(權管)을 차임(差任)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상남도 고성현의 혜질이곶(惠叱伊串)은 축성을 하지 않고 군사도 주둔시키지 않은 채 후라(候邏) 즉, 순찰활동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방의 관리는 내륙, 즉 북방 지역에서도 병마절도사, 첨절제사(첨사), 만호, 권관 등과 같이 마찬가지로 관방의 규모나 성격에 따른 관방 체계를 갖추었다.
이러한 관방유적의 설치 목적은 무엇보다도 대륙과 맞닿은 국경지대나 왜적이 출몰하는 해안의 요충지에 설치하여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자 함에 있었다. 특히 제주도의 경우는 비양도(飛陽島)로서 왜적이 배를 가까이 댈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여 방호소(防護所)와 수전소(水戰所) 등 많은 관방을 축성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관방을 설치하였다. 즉, 가정(嘉靖) 2년(1523)에는 일반 상선(商船)의 출입을 금하고자 황해도 토산현(兎山縣)의 대진관(大津關),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의 비파곶(琵琶串) 등에 관방을 설치하였다. 또 도적의 출몰에 따라 민간의 위험이 있는 교통로에도 설치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중종 15년(1520)에 설치한 장성군 영로(嶺路) 상의 위령군보(葦嶺軍堡)가 있다.
그리고 농보(農堡)라하여 일반 백성들이 드나들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는 관방시설을 두기도 하였다. 농보는 대체로 함경도 일대에 설치한 6진 지역에 위치하며, 삼수군(三水郡)의 소농보(小農堡) · 신방구비농보(神方仇非農堡)나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의 녹둔도농보(鹿屯島農堡)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관방유적을 축성 재료에 따라 살펴보면 대체로 석축한 경우가 대부분이나 목책을 이용하거나 드물게 토축(土築)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토축의 관방으로는 함경도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의 근동보(芹洞堡)나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의 진북보(鎭北堡) · 오롱초보(吾弄草堡) 등이 해당한다. 한편, 함경도 길성현(吉城縣)의 이덕소보(梨德小堡)는 둘레가 553척이고 높이가 7척에 이르는 판성(板城)으로 기록되고 있어 목책과는 별도로 널빤지 모양의 나무를 이용한 축성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방(關防) 조에는 당시의 관방에 대한 현황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경기도의 경우 7개소, 충청도 12개소, 전라도 28개소, 제주도 27개소, 경상도 36개소, 강원도 5개소, 함경도 58개소, 평안도 50개소, 황해도 13개소 등 모두 236곳에 이른다. 관방시설이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 이민족의 침입이 많았던 북계 지역에 집중되고 있으며,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에도 많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명 | 부군현명 | 관방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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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7) |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 화량진(花梁鎭), 영종포영(永宗浦營) |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 제물포영(濟物浦營) | |
안산군(安山郡) | 초지량영(草芝梁營) | |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 정포영(井浦營) | |
교동현(喬桐縣) | 월곶진(月串鎭), 교동량영(喬桐梁營) | |
충청도 (12) |
서천군(舒川郡) | 서천포영(舒川浦營) |
서산군(瑞山郡) | 파지도영(波知島營), 고파지도수(古波知島戍), 요아량수(要兒梁戍) | |
태안군(泰安郡) | 소근포진(所斤浦鎭), 안흥량수(安興梁戍) | |
비인현(庇仁縣) | 도두음곶수(都豆音串戍) | |
남포현(藍浦縣) | 마량진(馬梁鎭) | |
보령현(保寧縣) |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 | |
해미현(海美縣) |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 |
당진현(唐津縣) | 당진포영(唐津浦營), 난지도수(難知島戍) | |
전라도 (28) |
부안현(扶安縣) | 검모포영(黔毛浦營) |
옥구현(沃溝縣) | 군산포영(群山浦營) | |
영암군(靈巖郡) | 달양영(達梁營) | |
영광군(靈光郡) | 다경포영(多慶浦營), 법성포영(法聖浦營) | |
함평현(咸平縣) | 임치진(臨淄鎭) | |
장성현(長城縣) | 위령군보(葦嶺軍堡) | |
무안현(務安縣) | 목포영(木浦營) | |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 회령포영(會寧浦營) | |
진도군(珍島郡) | 금갑도영(金甲島營), 남도포영(南桃浦營) | |
강진현(康津縣) |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마도영(馬島營), 가리포진(加里浦鎭) | |
해남군(海南郡) | 우도수군절도사영(右道水軍節度使營), 어란포영(於蘭浦營) | |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 좌도수군절도사영(左道水軍節度使營), 돌산포영(突山浦營), 여수석보(麗水石堡), 방답진(防踏鎭), 장군도성(將軍導城) | |
흥양현(興陽縣) | 사도진(蛇渡鎭), 녹도영(鹿島營), 여도영(呂島營), 발포영(鉢浦營), 율현보성(栗峴堡城), 백석포장성(白石浦長城), 풍안평장성(豊安坪長城) | |
제주도 (27) |
제주목(濟州牧) | 조천관방호소(朝天館防護所), 금령포방호소(金寧浦防護所), 도근천방호소(都近川防護所), 애월포방호소(涯月浦防護所), 명월포방호소(明月浦防護所), 건입포수전소(巾入浦水戰所), 조천관포구수전소(朝天館浦口水戰所), 금령포구수전소(金寧浦口水戰所), 벌량포수전소(伐梁浦水戰所), 도근천포구수전소(道近川浦口水戰所), 애월포구수전소(涯月浦口水戰所), 명월포구수전소(明月浦口水戰所), 별방성(別防城), 좌우위(左右衛) |
정의현(旌義縣) | 대수산방호소(大水山防護所), 서귀포방호소(西歸浦防護所), 오소포방호소(吾召浦防護所), 오소포수전소(吾召浦水戰所), 서귀포수전소(西歸浦水戰所) | |
대정현(大靜縣) | 서귀방호소(庶歸防護所), 동해방호소(東海防護所), 새포방호소(塞浦防護所), 모슬포방호소(毛瑟浦防護所), 범질포방호소(犯叱浦防護所), 모슬포중수전소(毛瑟浦中水戰所), 새포동수전소(塞浦東水戰所), 범질포서수전소(犯叱浦西水戰所) | |
경상도(36) | 경주부(慶州府) | 감포영(甘浦營) |
울산부(蔚山府) | 좌도병마절도사영(左道兵馬節度使營), 좌도수군절도사영(左道水軍節度使營), 남포영(藍浦營), 서생포영(西生浦營) | |
흥해군(興海郡) | 칠포영(漆浦營) | |
동래현(東萊縣) | 부산포진(釜山浦鎭), 해운포영(海雲浦영), 다대포영(多大浦營) | |
장기현(長鬐縣) | 포이포영(包伊浦營) | |
기장현(機張縣) | 두모포영(豆毛浦營) | |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 축산포영(丑山浦營) | |
영덕현(盈德縣) | 오포영(烏浦營) | |
진주목(晋州牧) | 적량(赤梁), 삼천진(三千鎭) | |
남해현(南海縣) | 평산포영(平山浦營), 성고개보(城古介堡), 우고개보(牛古介堡), 미조항진(彌助項鎭), 곡포보(曲浦堡), 상주포보(尙州浦堡) | |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 금단곶보(金丹串堡) | |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 좌도병마절도사영(左道兵馬節度使營) | |
거제현(巨濟縣) | 우도수군절도사영(右道水軍節度使營), 영등포영(永登浦營), 옥포영(玉浦營), 조라포영(助羅浦營), 지세포영(知世浦營), 율포보(栗浦堡) | |
고성현(固城縣) | 사량영(蛇梁營), 당포영(唐浦營), 가배량수(加背梁戍), 소을비포수(所乙非浦戍), 혜질이곶(惠叱伊串) | |
웅천현(熊川縣) | 제포진(薺浦鎭), 안골포영(安骨浦營) | |
강원도(5) |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 삼척포진(三陟浦鎭) |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 대포영(大浦營) | |
평해군(平海郡) | 월송포영(越松浦營) | |
고성군(高城郡) | 고성포영(高城浦營) | |
울진현(蔚珍縣) | 울진포영(蔚珍浦營) | |
함경도(58) |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 | 도안포영(道安浦營) |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 랑성포영(浪城浦營) | |
단천군(端川郡) | 오을족보(吾乙足堡), 쌍청보(雙靑堡), 증산보(甑山堡) | |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 혜산진(惠山鎭), 운룡보(雲龍堡), 인서외보(因庶外堡), 동인보(同仁堡), 진동보(鎭東堡) | |
삼수군(三水郡) | 라난보(羅暖堡), 어면보(魚面堡), 가을파지보(加乙波知堡), 소농보(小農堡), 신방구비농보(神方仇非農堡), 별해보(別害堡), 인차외보(仁遮外堡), 감파농보(甘坡農堡) | |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 | 어유간보(魚游澗堡), 주을온보(朱乙温堡), 삼삼파보(森森坡堡), 오촌보(吾村堡), 보노지책(甫老知柵), 보화덕책(甫化德柵), 보화보(甫化堡), 근동보(芹洞堡) | |
길성현(吉城縣) | 서북보(西北堡), 사하북보(斜下北堡), 덕만동소보(德萬洞小堡), 이덕소보(梨德小堡), 장군파보(將軍坡堡) | |
명천현(明川縣) | 사마동보(斜亇洞堡) | |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 | 훈융진(訓戎鎭), 아산보(阿山堡), 안원보(安原堡), 고아산보(古阿山堡), 진북보(鎭北堡), 오롱초보(吾弄草堡), 건원보(乾元堡) | |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 고령진(高嶺鎭), 풍산보(豊山堡), 보을하진(堡乙下鎭) | |
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 | 북도절도사행영(北道節度使行營), 동관진(潼關鎭), 방탄보(防坦堡), 세천보(細川堡) | |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 | 유원진(柔遠鎭), 미전진(美錢鎭), 영건보(永建堡), 황자파보(黃柘坡堡) | |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 무이보(撫夷堡), 조산포영(造山浦營), 아오지보(阿吾地堡), 서수라보(西修羅堡), 녹둔도농보(鹿屯島農堡) | |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 | 옥련보(玉蓮堡), 무산보(茂山堡), 양영만동보(梁永萬洞堡) | |
평안도 (50) | 삼화현(三和縣) | 광량진(廣梁鎭) |
안주목(安州牧) | 노강진(老江鎭) | |
의주목(義州牧) | 방산진(方山鎭), 인산진(麟山鎭), 수구보(水口堡), 청수보(靑水堡), 소곶보(所串堡), 고미성보(姑未城堡), 광평보(廣坪堡), 옥강보(玉江堡), 송산보(松山堡), 성고개보(城古介堡) | |
창성도호부(昌城都護府) | 창주진(昌洲鎭), 운두리산보(雲頭里山堡), 대실호리보(大失號里堡), 갑암천보(甲岩川堡), 어정난보(於丁灘堡), 전자동보(田子洞堡), 우구리책(牛仇里柵) | |
삭주도호부(朔州都護府) | 구령보(仇寧堡) | |
곽산군(郭山郡) | 선사포(宣沙浦) | |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 | 만포진(滿浦鎭), 고산리보(高山里堡), 추파보(楸坡堡), 상토보(上土堡), 외괴보(外恠堡), 등공구비(登公仇非), 벌등포보(伐登浦堡), 고합보(古哈堡), 마마해보(麽麽海堡), 황청보(黃靑堡), 종포보(從浦堡) | |
위원군(渭原郡) | 가을한동보(加乙罕洞堡), 직동성(直洞城), 남파보수책(南坡堡水柵) | |
이산군(理山郡) | 아이보(阿耳堡), 산양회보(山羊會堡), 금사동보(金士洞堡) | |
벽동군(碧潼郡) | 벽단진(碧團鎭), 대파아보(大坡阿堡), 소파아보(小坡阿堡), 추구비보(楸仇非堡), 소실호리보(小失號里堡), 광평보(廣坪堡), 마전동보(麻田洞堡), 신성보(新城堡), 오음회목책(吾音會木柵), 울농괴목책(亐農恠木柵), 다대동목책(多大洞木柵), 비아리보(非兒里堡) | |
황해도(13) | 수안군(遂安郡) | 방원진(防垣鎭) |
토산현(兎山縣) | 대진관(大津關) | |
해주목(海州牧) |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용매량영(龍媒梁營) | |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 | 허사포영(許沙浦營), 비파곶(琵琶串) | |
옹진현(瓮津縣) | 소강진(所江鎭), 관량수(館梁戍) | |
은율현(殷栗縣) | 광암량영(廣巖梁營) | |
강음현(江陰縣) | 탈미곡군영(脫彌谷軍營) | |
강령현(康翎縣) | 가을포영(茄乙浦營) | |
장연현(長淵縣) | 오차포영(吾叉浦營), 아랑포영(阿郞浦營) | |
〈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관방 현황 |
관방(關防)은 국경의 방비를 위함이나 주변 국가와의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신중히 설치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정종(靖宗) 원년(1035)에는 거란이 흥화진(興化鎭)으로 통첩(通牒)을 보내 석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지 말라고 하자 영덕진(寧德鎭)에서 회답하기를 지점을 선택하여 요해지(要害地)를 설정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떳떳한 일이요, 노(魯)나라에서 관방을 폐지한 것은 통행하는 사람들의 심각한 교훈이 되었으므로 성과 목책을 설치하여 우리의 국토를 방비하는 것은 대개 변경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으로 거란과의 교통을 막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거란 등 접경국과의 불안한 관계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슬기로운 지혜를 발휘하였다.
또 조선시대에는 새롭게 확장된 영토 내에서 이주 농민의 안정된 경작을 위해 농보(農堡)를 설치하는 등 국경지대의 관방 체계를 구축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다. 국방을 견고히 함으로써 내부적으로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안정을 동시에 이룩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노력과 땀이 고스란히 관방 유적에 담겨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