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종이 바탕에 수묵채색. 세로 111.8㎝, 가로 356.4㎝.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진주성 내외의 지리적 형세와 풍광을 10폭 병풍에 재현한 조선 후기의 회화식 지도이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는 읍성의 구조와 성 안팎의 공공 시설물, 주변의 지형지세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산악과 수목, 건물, 인물 등 경물(景物) 묘사에 회화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진주는 조선시대 왜적의 방비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때 두 차례나 큰 전투가 벌어진 고을이었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3년(선조 36) 경상우병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이전되었고, 경상우병마절도사가 일정 기간 동안 진주목사를 겸임하였다. 이후 군사 업무와 일반 업무를 구분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진주목사가 따로 파견되어 성 밖 북쪽에 위치하는 관아에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군사와 일반 행정업무의 주체가 서로 달랐던 상황은 「진주성도(晋州城圖)」의 화면에서도 확인된다.
진주성은 1591년(선조 24)에 성의 동쪽 구역이 확장되었고, 1605년(선조 38)에 성곽을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진주성도」10폭 중 3~5폭의 화면 중앙부에 석축으로 구분된 내, 외성의 경관이 자리하고 있다. 중요 시설물에는 명칭이 부기되어 있는데, 군사시설을 비롯해 대부분의 공공시설이 내성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특히 병마절도사의 집무공간인 운주헌(運籌軒)을 비롯해 진남루(鎭南樓), 중영(中營), 촉석루(矗石樓), 창렬사(彰烈祠) 등이 비중 있게 묘사되었다. 남강변(南江邊) 촉석루 밑에서 임진왜란 때 논개(論介)가 적장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 장소로 전하는 의암(義巖)도 확인된다. 또 남강과 연결되는 해자(垓字)로 북쪽 외성 너머에 조성한 못, 즉 대사지(大寺池)에는 연꽃이 만발해 한여름의 풍치를 느끼게 한다.
북쪽 성 밖에는 진주목사가 거처하며 공무를 집행하던 관아(官衙)와 진영(鎭營), 객사(客舍), 향교(鄕校) 등이 자리하고 있다. 각각 주된 건물과 담장, 출입문, 부속건물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어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나머지 넓은 공간은 진주 외곽의 산악과 도로, 전답으로 채워져 있으며, 들판 곳곳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남강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배가 그려져 있다. 한편 촉석루 마당 한쪽에 1823년(순조 23)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이 새로 지은 의기사(義妓祠)가 있는 점을 들어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진주성도는 18세기 들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유행하면서 등장한 일종의 회화식 군현지도의 범주에 속한다. 현재 진주성도는 한양이나 평양의 전경(全景)을 담은 사례들과 함께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화면의 구성과 내용, 표현법은 거의 대동소이하여 진주성도가 정형화된 이후 큰 변화 없이 반복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진주성도」는 전체 규모나 회화성 면에서 그 중 돋보이는 사례이다. 비록 바탕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었고, 대사지의 연잎 표현에 쓴 채색 안료가 일부 탈락되긴 했으나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연잎과 일부 건물의 부재를 제외하면, 산악과 각종 수목, 인물 등 대부분의 경물이 수묵담채로 그려졌다. 이미 형식화된 필치이긴 하지만 묘사력이 안정적이어서 기본기를 갖춘 화가의 솜씨로 보인다. 화풍상의 특징이 18세기의 문인화가로 한때 진주에서 가까운 소촌(召村)의 찰방을 역임했던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과 연계되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 「진주성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20여 점 가량의 작품 중 유일하게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사례로서 조선 후기에 확립된 진주성도의 전형적인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다. 특히 관아와 누정, 사당 등 주요 시설물을 꼼꼼히 재현하고 명칭을 묵서해 놓아 진주성의 옛 모습을 고증하는 데 유용한 시각자료이다. 또한 대규모 화면에 펼쳐진 장대한 경관과 회화성 짙은 세부 표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현존 진주성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