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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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권재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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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세종 2)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
내용 요약

경자자는 1420년(세종 2) 조선시대 활자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인 주자소에서 만든 조선의 두 번째 동활자이다. 이 활자는 조선 최초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중간자와 작은자의 크기가 대체로 같아 계미자본보다 활자가 크게 개량되었다. 글자 모양은 계미자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박력이 있고 예쁜 편이다. 갑인자와 비교해 주조가 거칠고 고르지 못해 옆줄이 똑바로 맞지 않고 드나듦이 있다. 경자자본은 비교적 여러 종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치통감강목』·『장자권재구의』·『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 등이 있다.

목차
정의
1420년(세종 2)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
내용

조선 최초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단점을 보완하여 1420년 경자년에 만든 두번째 동활자이다. 계미자의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또 주조가 거칠어 인쇄하는 도중 활자동요가 자주 생겨 능률이 오르지 않으므로 세종이 다시 주1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조선의 주자기술은 2단계의 개량을 보았다. 활자주조는 세종의 지휘 아래 이천(李蕆)과 남급(南汲)이 담당하고 김익정(金益精)정초(鄭招)가 감독업무를 관장하였다.

경자자의 자본(字本)에 관하여 경자자를 주조하고 쓴 변계량(卞季良)의 「주자발(鑄字跋)」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성종갑진자(甲辰字)를 주성하고 쓴 김종직(金宗直)의 「신주자발」에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은 계미자와 같이 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 고주본(古注本)의 시(詩) · 서(書) · 『좌씨전(左氏傳)』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경자자의 글자체를 해정한 주2로 보는 이가 있다. 그러나 원나라의 예사의(倪士毅)가 집석한 『중용주자혹문(中庸朱子或問)』의 원나라 판본을 1371년(공민왕 20) 진주목에서 간행해 낸 주3의 글자체와 비교해 보면 아주 흡사하다. 이러한 글자체는 남송(南宋) 때 쓰여지기 시작하여 원나라 때 성행되고, 드물게는 명나라 초기까지의 간본에서 볼 수 있다. 그 글자 모양이 계미자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박력이 있고 예쁜 편이다.

경자자의 주조 개량에 관하여는 『세종실록』에 “앞서 주조한 계미자는 주조가 정교하지 못하여 조판용 동판에 밀랍을 깔고, 그 위에 활자를 놓은 다음 녹여 고착시켜 인쇄하였기 때문에, 인쇄 도중 자주 활자의 동요가 생겨 밀랍을 많이 쓰면서도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경자자에 이르러 조판용 동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어 서로 잘 맞도록 개량하였더니, 밀랍을 녹여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고 매우 해정하여 인쇄능률이 올랐다.”라고 하였다. 성현(成俔)『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처음에는 활자의 배열 방법을 몰라 판에 밀랍을 녹여 활자를 고착시켰기 때문에 경자자의 끝이 모두 송곳처럼 뾰죽하였는데, 그 뒤 비로소 대나무로 빈 데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밀랍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으니 사람의 교용(巧用)이 무궁함을 처음으로 알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실록이 당대의 기록에 의한 것이고 성현의 글이 뒤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나 설명에 있어서 그 내용이 상충한다.

현재 전하고 있는 여러 경자자본을 보면 조판틀이 개량되어 계선의 위아래를 틀에 고착시키지 않은 것이 계미자본의 경우와 다른 점이나, 주로 11항 21자의 사주쌍변(四周雙邊)이 많이 나타나고 있듯이 대부분이 고정된 틀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다음에 개주된 갑인자본의 경우와 비교하여 다른 점이다. 활자도 중간자와 작은자의 크기가 대체로 같아 계미자본의 경우보다 크게 개량되었지만, 이것 또한 갑인자와 비교하면 주조가 거칠고 고르지 못한 편이어서 옆줄이 똑바로 맞지 않고 다소의 드나듦이 있다. 이렇듯 기술상에 미진한 점이 그 인본에 나타나고 있기는 하나, 조선의 주자인쇄술이 경자자에 이르러 진일보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하루의 인쇄량도 종전보다 상당히 증진되었다. 그 인출량을 『세종실록』에서는 ‘수십백지’라 하였고, 변계량의 경자자 「주자발」에서는 ‘이십여지’라 하여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계미자의 경우가 하루에 ‘수지(數紙)’이고, 세번째로 기술을 대폭 개량하여 주조한 갑인자의 경우가 하루에 ‘사십여지’임을 생각하면 두번째로 개주된 경자자의 경우는 20여지가 옳을 것이다. 실록의 ‘수십백지(數十百紙)’는 ‘수십여지(數十餘紙)’의 오식으로 보인다. 이 경자자본은 비교적 여러 종이 전래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 ·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용재총화(慵齋叢話)』
『이조시대의 주자인쇄』(백린, 한국도서관협회, 1969)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보진재, 1982)
『한국금속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
「이씨조선주자인쇄소사」(김원룡, 『향토서울』 3, 1958)
「한국청동활자인쇄술발전의 기술사적배경」(전상운, 『성신여자사범대학논문집』 3, 1970)
주석
주1

활자나 주물 따위를 고쳐 다시 주조함. 우리말샘

주2

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순의 서체. 우리말샘

주3

한 번 새긴 책판을 본보기로 삼아 그 내용을 다시 새긴 책.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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