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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南京)

고려시대사지명

 고려시대 삼경(三京)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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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한양, 한성, 서울
분야
고려시대사
유형
지명
성격
고지명, 행정지명
소재지
서울특별시
시대
고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시대 삼경(三京)의 하나.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고려의 삼경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성종 때 경주에 동경(東京)이 설치되면서 수도인 개경(開京, 또는 中京)과 평양에 설치된 서경(西京)을 합해 삼경이라 칭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문종 때에 남경이 설치되어 사경(四京)이 되었다. 그러나 사경이라는 호칭을 피해 때로는 개경을, 때로는 동경을 제외시켜서 삼경이라 칭하였다. 개경을 제외시킨 삼경은 지방 행정 구획상의 지칭이고, 동경을 제외시킨 삼경은 국왕 순수경(巡狩京)으로서의 지칭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형성 및 변천
남경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1067년(문종 21)인데, 남경 궁궐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 해이다. 문종이 남경을 설치한 동기는 『도선기(道詵記)』·『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에, 삼각산 아래 지역이 제왕(帝王)의 도읍이 될 만하다는 내용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경은 몇 년 뒤에 폐지되었다가, 1104년(숙종 9)에 이르러 다시 설치되었다. 그 재설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096년(숙종 1)에 음양관(陰陽官)으로 있던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는 『도선기』·『삼각산명당기』·『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신지비사(神誌祕詞)』 등의 예언을 인용해 상서하였다.
상서의 내용은 삼각산의 남쪽 목멱산(木覓山)의 북쪽 평지에 남경도성을 건립하고 수시로 순주(巡駐)주 01)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 1099년 왕명으로 남경의 재설치를 논의했고, 2년 뒤 9월에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최사추(崔思諏)·윤관(尹瓘) 등을 양주(楊州)로 보내어 궁궐터를 살펴보게 한 뒤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1104년 5월남경궁궐을 낙성하고 재경영을 시작하였다. 이 때 재건된 남경궁궐은 경복궁의 북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청와대 부근으로 추측된다.
한편, 남경의 영역은 동으로는 낙산(駱山), 서로는 안산(鞍山), 북으로는 북악(北岳), 남으로는 신용산(新龍山)의 남단에까지 이르렀다. 남경의 재경영이 시작된 뒤 숙종 자신은 물론 역대의 여러 왕들이 남경에 자주 순주하였다.
또한, 고려 말에는 이곳으로 일시 천도(遷都)하기까지 하였다. 즉, 1382년(우왕 8)에는 우왕이, 1390년(공양왕 2)에는 공양왕이 일시 천도했으나 모두 곧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남경이 설치된 지역은 원래 양주 땅으로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여 있었다.
그러나 1069년(문종 23) 경기를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신경기(新京畿)가 만들어지자 남경은 이 신경기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문종은 이곳에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을 설치하였다.
남경유수관에는 3품 이상으로 임명하는 유수(留守) 1인, 4품 이상의 부유수(副留守) 1인, 6품 이상의 판관(判官) 1인, 8품 이상의 법조(法曹) 1인, 9품 이상의 문사(文師)·의사(醫師) 각 1인 등의 관원이 배속되었다.
그 뒤 남경유수관은 1308년(충렬왕 34)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고, 윤(尹)·판관(判官)·사록(司錄) 등의 관원이 두어졌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연구(硏究)』 ( 이병도 ,아세아문화사,1980)

  • 「고려시대(高麗時代) 경기(京畿)의 통치제(統治制)」 ( 변태섭 , 『고려정치제도사연구(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임금이 나라 안을 순행하며 머묾.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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