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재위: 918∼943) 왕건(王建, 877~943) 선대부터 예성강 일대에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신라 때 송악(松嶽)이라 불렀으며, 왕건의 아버지 왕융(王隆)의 건의에 따라 궁예(弓裔, ?~918)가 잠시 도읍으로 삼은 적이 있다. 궁예는 철원(鐵原)으로 도읍을 옮겼다.
918년(태조 1)에 철원에서 즉위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태조 2)에 도읍을 송악 남쪽으로 정하여 고려의 수도로 삼았다. 태조는 송악을 중심으로 개성군 등 5개 지역을 묶어 개주(開州)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양경(兩京) 혹은 삼경(三京) 체제를 마련하여, 서경(西京)과 동경(東京), 남경(南京) 등에 개경의 역할을 보완하는 기능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1232년(고종 19)에 몽골이 침입하자 무신 집권자였던 최우(崔瑀)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이후 1270년(원종 11)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수도로서 기능하지 못하였다.
개경의 주요 시설은 여러 시기에 걸쳐 건설되었다. 송악산 밑에 법궁인 본궐(本闕)이 있었으며, 본궐을 둘러싼 궁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4.7㎞ 규모의 황성(皇城)이 있었다. 수도 전체를 아우르는 나성(羅城)은 1029년(현종 20)에 완성되었는데, 길이는 약 23㎞였다. 나성 내부는 동 ⋅ 서 ⋅ 남 ⋅ 북 ⋅ 중의 5부로 나누고, 각 부는 방(坊)으로, 그 하위는 리(里)로 나누었다. 나성 외부의 일정 범위 지역까지는 4교(四郊)로 편성되었다.
불교 사원은 태조 대에 10개 사찰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도 여러 사찰이 나성 내외에 건설되었다. 종묘와 사직 같은 유교 제사 시설은 10세기 후반 성종(재위: 981~997) 대에 건설되었다.
고려 중기부터는 개경의 지덕이 쇠약해졌으니 이곳을 쉬어 주고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는 풍수설이 유행하였다. 서경이나 남경으로의 천도설이 나오기도 하였고, 개경 주변에 궁궐을 새로 짓거나, 한양(漢陽)이나 장단(長湍) 등지로 국왕이 행차하여 몇 달 동안 머무르는 순주(巡駐)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이 1394년(태조 3)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경은 경(京)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가 설치되었다가 세종(재위: 1418~1450) 대에 부(府)로 편제하고 유수(留守)를 두었다.
수도는 일반적으로 경(京) · 도(都) · 경사(京師) · 경성(京城) · 도성(都城)이라 불린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송악의 서쪽 개성군과 관련해서는 개성, 입지가 송악군이므로 송경(松京) · 송도(松都)라 불렸다. 신령스러운 수도라는 뜻의 신경(神京), 서경 · 남경 · 동경과 비교해 상경(上京), 가운데 있다 하여 중경(中京)이라고도 한다.
고려 당시 수도를 칭하는 명칭으로서 중경은 단 3건이다. 한 건은 숙종 대에 김위제(金謂碲)가 상서하기를 『도선기(道詵記)』에 고려 송악을 중경으로 한다는 기사에 있다. 1096년(숙종 1)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가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면서 인용한 『도선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에는 3경이 있어 송악을 중경, 목멱양(木覓壤)을 남경, 평양을 서경이라 하였는데, 11 · 12 · 1 · 2월에는 중경에, 3 · 4 · 5 · 6월에는 남경에, 7 · 8 · 9 · 10월에는 서경에 순행(巡幸)하여 머물면 해외의 36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도참 비기의 3경은 지방제도로서의 경(京)과는 무관해 보인다. 고려 지방제도는 개경과 서경 · 동경 · 남경[楊州]이 설치되었고, 중경이 설치된 바는 확인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1296년(충렬왕 22)에 관제개혁 당시 " 이혼(李混)을 검교(檢校) 사공(司空) 서경유수로, 정해(鄭瑎)를 남경유수로, 최충소(崔冲紹)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行) 행중경유수로, 박의(朴義)를 동지자정원사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 관제를 개혁하면서 원경(元卿)을 중경유수 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로 삼았다는 데서도 중경유수가 등장한다.
중경은 고려와 이웃하던 거란[요(遼)], 여진[금(金)]에서도 다경(多京) 중 하나를 칭하던 용어였다. 금나라는 5경제였는데, 상경 · 중경 · 흥중부의 3로로 구성되었다. 거란도 5경으로 운영되었다. 거란의 옛땅을 임황(臨潢), 한(漢)나라의 요동(遼東)이며 발해(渤海)의 옛 지역을 요양(遼陽), 당나라 이래 거란이 차지해 오던 지역을 중경이라 하였다. 거란(요) · 여진(금) · 발해와 쌍방 간 영향을 주고받던 고려시대 당시 중경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였을 개연성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중경은 조선에서 그 용례가 일반성을 획득하였다. 14세기 말 15세기의 양성지(梁誠之)는 “요 · 금 · 발해도 아울러 5경을 세우고, 전조(前朝)도 4경을 세웠으니, 경도(京都)인 한성부(漢城府)를 상경으로 삼고, 개성부(開城府)를 중경으로 삼고, 경주(慶州)를 동경으로 삼고, 전주(全州)를 남경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으로 삼고,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삼아, 각각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군병(軍兵)을 가정(加定)하게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개성부를 중경으로 삼자는 논의에 이어서 차후 중경의 용례가 보편적으로 쓰여 19세기 지리지 · 지도서 제작이 활발할 때 송도의 고적을 기록한 서책인 중경지(中京誌)에서 표제어로 ’중경‘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