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노론(老論)

조선시대사단체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노론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분야
조선시대사
유형
단체
성격
조선시대 당파
시대
조선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서인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잡고 정사공신(靖社功臣) 김류(金濫)가 영도한 훈서(勳西) 또는 공서(功西)와, 반정을 관망했던 김상헌(金尙憲)이 영도한 청서(淸西)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훈서는 노서(老西)로, 청서는 소서(少西)로 다시 개편되었다.
둘로 갈라진 서인세력은 인조 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元斗杓)의 당인 원당(元黨)과 김자점(金自點)의 당인 낙당(洛黨)으로 다시 분파되었다.
청서파는 사림의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류들이 중심이 된 산당(山黨)과 권세에 아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한 한당(漢黨)으로 분립되어 서인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현종 때에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노론은 숙종 때 규합된 서인에서 분파된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분당의 계기는 1680년(숙종 6) 당시 영의정이었던 탁남(濁南)인 허적(許積)의 유악남용 사건(油幄濫用事件)과, 서인 김석주(金錫胄)와 김익훈(金益勳)에 의해 고변된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의 역모 옥사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경신환국 후, 정권을 잡은 서인간의 지도권 쟁탈전에서 비롯되었다.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 등의 강력한 남인 탄압에 반대한 소장파 한태동(韓泰東) 등이 김익훈을 탄핵, 상소하여 발단하였다. 당시 송시열 등 노장파는 김익훈에 대한 탄핵 상소에 반박해 소장파와 대립하였다. 특히 송시열은 그 문인인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분파 작용을 가속화시켰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를 노론이라 하고,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를 소론이라 불렀다. 노·소론에 속하는 당인은 원래 예학(禮學)의 태두 김장생(金長生)의 문인들로 구성되었다.
즉,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림(山林)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山黨)에 속했던 서인들이었다.
정권을 잡은 노론은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 윤(昀)의 세자책봉에 반대한 송시열·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이 물러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이른바 기사환국 때까지 약 10년 간 정권을 유지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를 계기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숙종 말이래 정국은 노·소론의 정쟁이 중심을 이루었다. 즉, 경종·영조 때에는 노·소론의 당세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상이 되었다.
경종·영조 때의 노론 출신 4대신이 당시 노론의 당세를 말해주는데, 경종 대의 4대신은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 등이다. 또한, 영조 대의 4대신을 들면,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정호(鄭澔)·홍치중(洪致中)이다.
그 뒤 1762년(영조 38) 장헌세자(莊獻世子)주 01)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노론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로 갈라졌다. 소론은 시파에 속했는데, 시파는 장헌세자의 불행한 죽음에 동정하는 당파이며 벽파는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처사라고 주장하는 당파이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영조 말에는 벽파가 우세했으나 정조 때에는 시파가 득세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金漢耉)의 딸 영조 계비 김씨(貞純王后)가 섭정하여 벽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을 계기로 시파인 노론 일부와 소론, 그리고 이에 동조했던 남인세력이 몰락, 노론 독주시대가 전개되었다. 또, 노론의 시파·벽파의 싸움은 의리를 위한 정쟁이 아닌 인물과 문벌 중심의 세력 다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노론 중에는 성리설(性理說)을 에워싸고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즉,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학문적·이론적 대립이 발생하였다. 즉,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논쟁에서 사람과 동물의 성(性)이 다르다고 주장한 한원진설을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또는 호론(湖論)이라고 하고, 사람과 동물의 성이 같다고 주장한 이간의 설을 인물성동론 또는 낙론(洛論)이라고 한다.
전자는 한원진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가 충청도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후자는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가 서울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호론과 낙론의 대립은 주자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벼슬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세력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숙종실록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순조실록

  • 연려실기술

  • 곽우록(藿憂錄)

  • 당의통략(黨議通略)

  • 이조당쟁사연구  (강주진,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 韓國政爭志  (幣原坦, 三省堂, 1927)

  • 「한국당쟁사」 ( 성악훈 ,『한국문화사대계』 2,1965)

  • 「예송과 노소분당」 ( 강주진 ,『아세아학보』 5,1968)

  • 「조선후기 붕당론의 전개와 그 성격」 ( 정만조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2)

  • 「조선후기 노소론의 대립과 그 정론」 ( 이은순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2)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思悼世子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홍순창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