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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계(文散階)

    고려시대사제도

     고려시대 문관의 위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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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문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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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고려시대사
    유형
    제도
    시대
    고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시대 문관의 위계제도.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관인들의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공적질서체계 였다. 이러한 제도를 중국으로부터 도입해 정식으로 채택한 것은 995년(성종 14)의 일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이러한 기능을 하는 관계(官階)가 있었다.
    태조는 개국과 동시에 신라의 위계제(位階制)를 채택하였다. 그렇지만 신라제도의 이용은 잠시 뿐 919년(태조 2)부터는 궁예(弓裔)의 관제로 쓰였던 대광(大匡)·대승(大丞)·원보(元甫) 등이 새로운 관계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것은 다시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것을 계기로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 향직조(鄕職條)에 보이는 바와 같은 16등급으로 확대·정비가 이루어졌다. 물론, 이를 전후해 신라식 위계를 일컬은 사례가 보이지만, 이 경우는 전통적 권위를 자랑해 보이려는 형식상의 의미가 강하였고 실제로 관인들의 공적인 지위와 서열을 규제한 것은 주로 대광 등의 관계였다.
    그런데 958년(광종 9)부터는 이와 같은 관계와 함께 중국식 문산계가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일련의 국가체제가 정비되는 995년에 이르러 마침내 후자가 유일한 공적질서체계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전자는 관계로서의 성격을 잃고 향직화하게 되었다.
    관계는 원래 문산계는 문반(文班)의 관계가 되고, 따라서 무반(武班)의 관계로 무산계(武散階)가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당(唐)나라나 조선에서는 이 원칙대로 시행하였는데, 고려시대도 무산계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무반의 관계로 기능하지는 못하였다. 무산계는 향리나 탐라(耽羅)의 왕족 등에게 주어졌을 뿐, 고려시대의 무반은 문반과 마찬가지로 모두 문산계를 받았던 것이다.
    995년 문무관료들의 관계로서 법제적 지위를 굳힌 문산계는 그 뒤 십여 차례나 변천되었다. 그 내용은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문산계조에 의해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사료는 기록상의 미비로 인한 누락이 많고, 잘못 서술된 부분이 있으며, 또 오자와 탈자 등 몇 가지 제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은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그리고 금석문(金石文)과 문집을 통해 보완이 가능하다. 그 결과를 정리하여 도표화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1]고려 말 조선 초의 문산계 비교표
    品 階공민왕 18년태조 1년
    正一品特進輔國三重大匡特進輔國崇祿大夫
    特 進 三 重 大匡輔 國 崇 祿 大夫
    從一品三 重 大 匡崇 祿 大 夫
    重 大 匡崇 政 大 夫
    正二品光 祿 大 夫正 憲 大 夫
    崇 祿 大 夫資 憲 大 夫
    從二品榮 祿 大 夫嘉 靖 大 夫
    資 德 大 夫嘉 善 大 夫
    正三品正 議 大 夫通 政 大 夫
    通 議 大 夫通 訓 大 夫
    從三品大 中 大 夫中 直 大 夫
    中 正 大 夫中 訓 大 夫
    正四品中 散 大 夫奉 正 大 夫
    中 議 大 夫奉 列 大 夫
    從四品朝 散 大 夫朝 散 大 夫
    朝 列 大 夫朝 奉 大 夫
    正五品朝 議 郞通 德 郞
    通 善 郞
    從五品朝 奉 郞奉 直 郞
    奉 訓 郞
    正六品朝 請 郞承 議 郞
    承 訓 郞
    從六品宣 德 郞宣 敎 郞
    宣 務 郞
    正七品修 職 郞務 功 郞
    從七品啓 功 郞
    正八品承 事 郞通 仕 郞
    從八品承 仕 郞
    正九品登 仕 郞從 仕 郞
    從九品將 仕 郞
    [표2]조선시대 문산계 표
    品 階文 散 階
    文 官宗 親儀 賓
    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顯祿大夫綏祿大夫
    輔 國 崇 祿 大夫興祿大夫成祿大夫
    從一品崇 祿 大 夫昭德大夫光德大夫
    崇 政 大 夫嘉德大夫崇德大夫
    正二品正 憲 大 夫崇憲大夫奉憲大夫
    資 憲 大 夫承憲大夫通憲大夫
    從二品嘉 靖 大 夫中義大夫資義大夫
    嘉 善 大 夫正義大夫順義大夫
    正三品通 政 大 夫明善大夫奉順大夫
    通 訓 大 夫彰善大夫正順大夫
    從三品中 直 大 夫保信大夫明信大夫
    中 訓 大 夫資信大夫敦信大夫
    正四品奉 正 大 夫宣徽大夫
    奉 列 大 夫廣徽大夫
    從四品朝 散 大 夫奉成大夫
    朝 奉 大 夫光成大夫
    正五品通 德 郞通 直 郞
    通 善 郞秉 直 郞
    從五品奉 直 郞謹 節 郞
    奉 訓 郞愼 節 郞
    正六品承 議 郞執 順 郞
    承 訓 郞從 順 郞
    從六品宣 敎 郞
    宣 務 郞
    正七品務 功 郞
    從七品啓 功 郞
    正八品通 仕 郞
    從八品承 仕 郞
    正九品從 仕 郞
    從九品將 仕 郞
    자료 : 『경국대전(經國大典)』.
    [표3]신분 직종에 따른 한품서용 표
    品 階文 散 階限品敍線兩班技術官·庶孼土官·鄕吏胥吏·其他
    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堂 上 官
    從一品
    正二品
    從二品
    正三品通政大夫
    正三品通訓大夫堂 下 官
    從三品
    正四品
    從四品朝奉大夫
    正五品通德郞參 上 官
    從五品
    正六品
    從六品宣務郞
    正七品務功郞參 下 官
    從七品
    正八品
    從八品
    正九品
    從九品將仕郞
    문산계의 조직은 크게 상층의 대부계(大夫階)와 하층의 낭계(郎階)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품계상으로 5품과 6품이 경계가 되고 있었지만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해 4품 이상과 5품 이하로 각각 한 품계씩 상향조정하고 있다. 정1품계인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설치에 따라 그와 같은 상향조정이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대부계와 낭계 사이에 큰 단층(斷層)이 존재하였던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사대부(士大夫: 실제로는 大夫·士)와 일정한 상응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한편, 대부계와 낭계 자체 내에도 각각 하나씩의 단층이 존재하였다. 대부계의 경우에 나타나는 종2품의 통헌대부(通憲大夫) 이상과 그 이하 사이와, 낭계에 있어서도 6품과 7품을 경계로 하는 참질(參秩)과 참외질(參外秩) 간의 구분이 그것이다. 본래 관계는 관직과 표리관계에 있었고, 따라서 관직세계의 재추(宰樞: 宰府·樞府의 2품 이상관)·상참(常參)·참상(參上)·참외(參外)와 같은 단층이 관계에도 보이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문산계는 문·무관인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질서체계였던 만큼 현직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처음의 입사(入仕)나 휴직·퇴관(退官) 등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일단 관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면 누구나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국가로서는 관계에 들어온 모든 인원에게 산계를 수여해 일정한 위계질서 내에 편성해 놓고 필요에 따라 현직관리로 뽑아 쓰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산계 소지자는 장차 관직에 취임할 후보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후보자들은 관직을 받은 경우에야 비로소 산계와 관직을 아울러 지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양자의 품계는 일치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산관(散官)에 맞추어 직사(職事)를 제수한다는 원칙이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고려에서는 그와 같은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다가 충선왕 이후에야 준행된다.
    원칙을 지키면서 산계와 관직 사이에 품계가 일치되지 않는 현상을 해결하려는 제도가 행수법(行守法)이었다. 즉, ‘계는 높으나 직이 낮은’ 경우에 관직명 앞에 ‘행’자를, 반대로 ‘계는 낮으나 직이 높은’ 경우에 ‘수’자를 넣어 표시하는 제도가 그것인데, 고려에서는 행수법이 시행되지 않은 것 같다.
    고려시대의 행수법은 관계와 관직 간의 관계(關係)를 나타내는 제도가 아니라 산직(散職: 검교직(檢校職)·동정직(同正職) 등 직사가 없는 허직)과 실직(實職) 사이를 조절하는 법제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고려의 문산계는 문·무관인들의 위계로서 그들의 관직세계를 규율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데서 우선 그 의의를 부여해도 좋다. 물론, 고려시대는 관계보다는 관직을 중시하였고, 또 양자간의 품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을 뿐더러 그것을 조절하는 행수법도 시행되지 않은 것 같아 제도로서의 미숙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산관에 맞추어 직사를 제수한다는 원칙만은 변함이 없었으며, 실제로 충선왕 이후 그것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아울러 그것은 재추·상참·참상·참외 및 공·경·대부·사와 같은 관료체계 내지는 신분서열과도 구조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양반과 관계조직」 (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일조각,1980)

    • 「고려시대의 문산계」 ( 박용운 ,『진단학보』 52,1981)

    • 「高麗初期の兩班について」 ( 末松保和 ,『東洋學報』 36-2,1953 ; 『靑丘史草』 1,笠井出版社,1965)

    • 「高麗の武散階-鄕吏」 ( 旗田巍 ,『朝鮮學報』 21·22,1961)

    • 「耽羅の王族·女眞の酋長·老兵·工匠·樂人の位階-」 ( 旗田巍 ,『朝鮮學報』 21·22,1961 ;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法政大學出版局,1972)

    • 「高麗初期の官階」 ( 武田幸男 ,『朝鮮學報』 41,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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