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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철(朴金喆)

북한인물

 일제강점기 혜산사건 과 관련된 사회주의운동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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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박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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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혜산사건 과 관련된 사회주의운동가.정치인.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함경남도 갑산 출신으로, 박달(朴達)과 함께 이 지역 반일운동을 선도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932년 갑산군 운흥면에서 야학을 운영하였으며, 1935년 3월 반일 공산조직인 갑산공작위원회 결성에 참가하여 출판 및 경제담당 책임자가 되었다.
1936년 조국광복회 국내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장백현(長白縣)으로 진출해 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을 박달과 함께 만나 항일민족통일전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박달과 함께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였고, 조국광복회 국내조직 확산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곧 일제에 의해서 체포되었는데, 그가 연루된 사건은 1937년 10월과 1938년 7월 두 차례에 걸쳐서 함경남도 북부지방과 장백현 일원의 조국광복회 조직원 739명이 검거된 ‘혜산사건’이었다. 1941년 8월 함흥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출옥 후 김일성을 도와 북한의 국가 건설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혜산사건 당시의 동지들로 이루어진 갑산파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조선노동당 내에서는 1948년 제2차 당대회에서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하였다.
박헌영(朴憲永)의 남로당세력이 당에서 축출된 1953년 8월의 제6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1955년 12월에는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제3차 대회(1956.4.)와 제4차 대회(1961.9.)에서 연이어 재선되었다.
그러나 1967년 김일성 개인 숭배의 광풍이 부는 가운데, 유일사상 위배·지방주의 조장 등의 명목으로 숙청당하였다. 당시 이 숙청은 그를 비롯하여 대남 담당 총책이었던 이효순(李孝淳) 등 갑산파 전원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들에게 부과된 죄명은 “당원들에게 부과된 당 정책교양과 혁명전통교양을 방해하였고, 당 안에 부르주아사상·수정주의사상·봉건유교사상·교조주의·사대주의·종파주의·지방주의·가족주의와 같은 온갖 반혁명적 사상을 퍼뜨려 당과 인민을 사상적으로 무장 해제시키려고 책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숙청으로 내몬 직접적인 이유는 그들이 김일성의 유일지도성을 해체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금철은 당 간부들에게 봉건서적인 『목민심서』를 필독 문헌으로 읽게 했다고 비판받았다.
그리고 당 역사연구소에서 그가 항일활동을 했던 함경남도 갑산에 생가를 꾸려주었고, 「일편단심」이라는 연극으로 자신의 부인의 수절을 형상화했다고 비판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김일성과 민주항일전쟁』 ( 와다 하루끼 저,이종석 옮김,창작과비평사,1992)

  • 조선로동당연구  (이종석, 역사비평사, 1995)

  • 「惠山事件判決書」 ( 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 第6卷,東京 韓國史料硏究所,1970)

  • 現代史資料  (姜德相 編, 東京 みすず書房, 1976)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1년)
이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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