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

가족
개념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를 가리키는 가족용어.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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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성씨는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를 가리키는 가족용어이다. 한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식 성씨제도를 수용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정착했다. 성은 동일하지만 본관을 달리하는 성씨는 계속 증가하고 있어서, 1985년 기준으로 보면 257개 성에 본관은 3,435개인 상황이다. 나라별로도 형식이 매우 다른 성씨와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조를 이루어 사상·문화·도덕·관습·법제의 근본이 되는 중요 요소이다.

정의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를 가리키는 가족용어. 칭호.
개념

성씨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단계혈연집단(單系血緣集團)의 한 명칭이며, 곧 족적 관념(族的觀念)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데서 결국 족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 것으로, 고대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더욱 밀착되어 있다.

후대의 성씨는 한자식 표기로서 이름 앞에 붙어 족계(族系)를 나타내는 동계혈족집단의 명칭을 가리키고, 이는 바로 중국식 출자율(出自律)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과 씨는 역사상 때로는 함께 붙어서, 때로는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관과 함께 사용하여 혈연관계가 없는 동일한 성과 구별된다. 여기에서 현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본 · 성 · 이름을 가지게 되어 있다.

성씨는 발생한 이래 계속 분화하여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며, 동성이면서 조상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또는 부의 성을 따르기도 하며 또는 모의 성을 따르는가 하면, 또는 혈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성을 거짓 사용하거나[冒姓] 변성(變姓) · 사성(賜姓) · 자칭성(自稱姓)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경우 삼대(三代:夏 · 殷 · 周) 이전에는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가 합쳐졌던 것이며, 씨는 신분의 귀천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성은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은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한다. 이름 그 자체만으로는 독립된 인격 행위를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성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다.

성은 그 사람이 태어난 부계혈통의 표지(標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 하여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 동안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 고래의 관습법이다.

현행 「민법」상으로 자(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제781조), 성이 잘못 불리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성의 변경은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의 문자구조에 관한 최초의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성인지소생야(姓人之所生也)”라 하듯이, 성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모계시대에는 여계의 혈통을, 부계시대에는 남계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또, 『좌전(左傳)』에 “천자건덕 인생이사성(天子建德 因生以賜姓)”이라 한 것처럼, 천자가 유덕한 사람을 세워 제후(諸侯)를 봉할 때 그 조상의 출생지로써 성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성에 의하여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 각기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씨이다. 『좌전』에 “조지토이명지씨(胙之土而命之氏)”라 한 바와 같이, 씨는 지명에 의하여 명명됨을 말하고 있다.

씨는 분화된 혈통(성)의 각각의 지연(地緣)을 표시하는 표지인 것이 분명하므로 그 본원적 의미는 성의 분파를 뜻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고전에서 말하는 성은 혈통의 연원을 표시하는 것으로 역시 우리의 성이라는 것에 해당되며, 씨란 같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써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된다.

경주 김씨 · 전주 이씨 · 밀양 박씨 등의 씨자에는 존칭적 의미도 잠재하여 있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씨는 또한 조선시대 양반의 처(妻)에 대한 이름 대용의 경칭적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성씨의 특징

우리나라의 성씨제도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의 수용 및 보급, 분화과정과 본관의 세분과 통폐합 등 성씨체계가 특이하고, 성명의 구성이 복잡하고 고유한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인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체계이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 위주의 가계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의 가에서 ‘을’의 가로 입적(入籍)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아내는 김(金)성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대(漢代) 이래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父)족과 부(夫)족의 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을 다만 가정을 표징(表徵)하는 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이라면 자식이나 새로 온 며느리 모두가 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안다.

우리의 그와 같은 성씨제도는 가족이 사회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출가하더라도 혈연관념상 자기의 출자한 씨족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또한 성씨 본래의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그 성씨와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조를 이루어 사상 · 문화 · 도덕 · 관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성씨제도의 하나인 사성(賜姓)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왕실과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거나 귀화인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와 같은 사성에는, 첫째 유덕한 자를 표창하는 일종의 영전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둘째 봉건시대 제후나 귀순한 호족 대우의 표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셋째 혼인을 정하는 하나의 표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혈연적인 귀속의식과 뿌리 깊은 성씨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호적에 반드시 본관을 적어넣어 부계혈통을 밝힌다든지,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을 금기시한다든지, 또는 각 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든가, 또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진다 하는 일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또한, ‘성불변의 원칙’은 우리 「민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으로서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드물다. 가령, 여자가 시집을 가서 남편의 호적에 들어가더라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자기 성을 유지한다. 그래서 같은 호주 밑에 한 가구로서 살면서도 조모의 성, 어머니의 성, 며느리의 성이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이는 한 집안에 여러 성이 섞여 있는 한국인 생각으로는 당연한 일이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만, 남편과 아내가 같은 성을 갖는 부부동성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외국인의 눈에는 이상한 일처럼 비쳐지고 있다.

일본의 「구민법(舊民法)」에서는 씨(우리 나라의 성에 해당)는 가(家)를 나타내는 법률상의 명칭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일가일씨주의(一家一氏主義)였다.

따라서,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은 곧 다른 가에 입적하는 것이므로 일단 시집을 가면 그 집의 성을 따르고, 또 개가를 하게 되면 다시 개가한 집의 성으로 바꾸기 마련이다.

이러한 관습은 서양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신민법에서는 씨도 각 개인의 호칭으로 바뀌었으므로 종래와는 달리 부부는 혼인할 때 서로 협의하여 어느 한 쪽의 성을 따르되, 이혼하면 본래의 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종래의 관습을 좇아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다.

이탈리아 · 스위스 · 오스트리아 · 독일 · 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른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관습이다. 하지만 이것은 법률상의 의무는 아니며, 아내는 혼인 전의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자유로이 바꿀 수도 있다.

소련의 경우는 부부가 서로 상의하여 어느 한 쪽의 성을 공통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거나 아니면 결혼 전의 각자의 성을 그대로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법률상의 규정이 그럴 뿐, 실제 관습은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임은 물론이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 자기의 성명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부가 같은 성을 쓰든 각기 다른 성을 쓰든 상관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만의 경우는 좀 독특하다. 아내는 자기의 본성 위에 남편의 성을 덧얹어[合冠] 사용하는 복성주의(複姓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혼인한 여자의 성명은 ‘남편의 성+자기성+이름’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세계에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국민도 많고, 또는 정치지도층(지배계층)만 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많다. 미얀마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아프리카 신생국들 가운데는 지배층만 성을 가지고 있고, 일반 국민은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프리카 신생국의 지도자들도 대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유학생 출신이 많으므로 서구식의 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튀니지 같은 나라에서는 1960년을 전후하여 대대적인 범국민창성운동(凡國民創姓運動)을 전개한 바 있다.

세계에서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랜 민족인 중국과 이웃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발전과 궤도를 같이하여 각 시대가 전환하는 고비마다 성씨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어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기존의 성이 분열하여 분관 · 분파작용을 하였는가 하면 소멸되기도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우리 성씨의 구체적인 모습은 최초의 인문지리지인 『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조에 담겨져 있다. 성씨 그 자체가 혈연과 지연의 이중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우리 성씨의 특징규명에는 성의 생성 · 분화 과정과 함께 그 성의 출자지(出自地), 곧 본관의 지역적 구획과 연혁을 동시에 결부시켜 고찰해야 한다.

중국식 성씨제도는 벌써 삼국시대부터 왕실 · 귀족순으로 수용되어 왔지만 한국적 성씨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 초기였다.

후삼국시대의 격심한 사회적 변동에 따른 신분제의 재편성과정에서 태조 왕건(王建)은 반도를 재통일한 다음 당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을 각 출신지역별로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지역적 · 신분적으로 재편성하였고, 이러한 성씨체계가 뒷날 『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로 나타났던 것이다.

고려 초기에 전국 주 · 부 · 군 · 현과 향 · 소 · 부곡 등 군현과 임내(任內)별로 분정된 성씨의 구성요소는 읍치(邑治)의 지배성단인 인리성(人吏姓)과 촌락지배성단인 백성성(百姓姓) 및 각종 임내성이었다. 이들 성씨의 수장들은 후삼국시대에는 성주 · 촌주 등의 직함을 지니면서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이른바 호족이며,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 · 거주지별로 토성(土姓:토박이성)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 진출한 귀족과 고급 관인을 출신 성씨별로 분석해 보면, 소수의 중국 · 발해계의 귀화인 · 유민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군현의 토성들이었다.

후삼국시대 호족들은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개국관료와 태조공신(太祖功臣:三韓功臣)이 되고 각기 성과 본관을 분정 또는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각 읍(邑) 성씨들은 본관을 떠나 일찍이 서울로 진출하여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거나 그대로 토착한 성씨는 각기 읍사(邑司:州司 · 府司 · 郡司 · 縣司 · 鎭司 · 鄕司 · 部曲司 등)를 중심으로 향리 · 장리(長吏)층을 구성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해 나갔다.

이러한 군현성씨의 진출기반은 강력한 씨족적 유대와 공고한 경제적 기반 및 학문적 · 행정적 소양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였다. 고려 광종 이후에 새로 진출한 성씨들은 대개 군현 향리층의 자제였다.

그들은 향공(鄕貢) · 상경유학(上京留學) · 기인(其人) · 시위(侍衛) · 선군(選軍) · 부전(赴戰) 등의 수단을 통하여 당시의 3대 출사로인 문(文) · 무(武) · 이(吏)의 세 계열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시대가 내려올수록 지방성씨의 진출이 활발하여 지배층의 저변확대를 가져왔다. 이런 추세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 급격한 정치적 · 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집권세력이 점차 문벌귀족에서 무신 내지 신진사대부로, 근기(近畿)지방의 군현토성에서 삼남지방의 토성으로, 대읍(大邑)토성에서 중소군현토성으로 확산되어 가는 결과로 나타났다.

빈번한 정변과 기성관인들의 정권쟁탈전이 끊임없이 세력교체를 가져왔고, 그러한 와중에서 지배세력의 신진대사가 활발하여 신흥세력은 주로 지방의 토착성씨에서 공급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각 본관마다 읍사를 중심으로 반근착절(盤根錯節)되어 있던 토성은 상경종사(上京從仕) · 유이(流移) · 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기존 토성의 소멸에서 망성(亡姓)이 생기고, 북진정책에 따른 사민(徙民)에서 입진성(入鎭姓)이 생겼는가 하면, 지역적인 이동에서 경래성(京來姓) · 내성(來姓) · 입성(入姓) 등이 발생하였고, 특히 고려 후기 군현간의 향리조정책에 의하여 속성(續姓)이 대량 발생하였다.

토성을 제외한 다른 성종(姓種)은 귀화성이나 새로운 사성을 제외하면 모두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며, 15세기라는 시기를 기준하여 볼 때 이른바 거족(鉅族)이나 신흥사족 및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출신 뿌리는 각기 군현토성에서 나왔다.

서울로 진출한 재경관료나 유향품관(留鄕品官)을 중심으로 한 경재소(京在所)유향소(留鄕所)의 구성 주체, 경저리(京邸吏) · 영리(營吏) · 읍리(邑吏)를 공급했던 향리의 주체들도 역시 군현성씨에서 나왔다.

고려시대 지방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던 계층은 각 읍 향리의 상층부인 호장(戶長)층이었다. 마치 서울의 집권세력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고관요직을 놓치지 않고 부지해 나가는 데서 가문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이, 토착세력은 호장층의 확보 여부가 그들 성씨의 세력소장에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지방 향리에서 서울로 진출한 계층은 대개 호장층의 자제였고, 후대에 대성명문으로 성장한 성씨의 시조 가운데는 호장이 많았다.

한편, 12세기 후반 무신집권을 계기로 한 급격한 사회변동은 군현 및 향 · 소 · 부곡 성씨의 대규모적 이동을 가져왔다. 그 결과 군현토성 이외에 촌성(村姓) · 향 · 소 · 부곡성과 내성 · 속성 등 비(非)토성 출신의 관인이 점차 증가해 갔는데, 이러한 추세는 원의 지배시기와 왕조교체기를 겪으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화과정에서 향리의 지위와 권한은 계속 저하되고 축소되어 갔으며, 후대에 올수록 향리에게 부과되는 향역(鄕役)이 과중해지자 토성향리의 유망이 보편화되었다. 이산한 향리자원을 보충하고 행정구역간에 향리수량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비토성 향리가 계속 증가해 갔다.

우리 성씨체계는 그 토대가 왕건의 토성 분정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중국의 경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성족분정(姓族分定)작업과 당태종(唐太宗)의 『정관씨족지(貞觀氏族志)』 편찬사업과 비교된다.

조위(曺魏)의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 실시를 계기로 문벌사회가 확립됨에 따라 각 군별로 군망(郡望)이 형성되어 갔다. 그 뒤 진실(晉室)의 남도(南渡)와 오호(五胡)의 강북지배에서 종전의 성망체제가 획기적으로 개편되었다.

그 결과 이른바 군성 · 교성(僑姓) · 오성(吳姓) · 노성(盧姓)이 지역과 씨족에 따라 구분되었고, 그들은 남북조 역대 왕조의 흥망과 집권세력의 소장에 따라 성씨와 가격(家格)이 한결같지 않았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군현성씨가 읍격(邑格)에 따라 주 · 부 · 군 · 현성이 있듯이, 수 · 당시대의 군망도 사해대성(四海大姓) · 군성 · 주성 · 현성이 있었다.

한편, 효문제가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면서 496년에 성족(姓族)을 새로 정하자 북방 이민족의 한성화(漢姓化)가 활발해진 것은, 신라 말 고려 초 호족이 고유명에서 한식성명을 수용한 경우와 비슷하였다.

한편, 당나라의 새 질서를 강화하려 했던 태종(李世民)은 당대의 현실적 힘의 관계에 의하여 기존의 최(崔) · 노(盧) · 이(李) · 정(鄭)과 같은 특정 대상의 성족을 확대, 개편해서 평준화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문벌관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당시에 합당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는 데 당태종의 의도가 있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군현토성을 분정한 배경도, 좁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도를 청산하고 새 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지배신분을 편성하는 데 있었다.

고려 태조는 940년 3월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하면서 경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고 6성의 출자처인 6부의 명칭을 개정하는 한편, 후일의 호장인 당제(堂祭:堂大等) 10명을 크게 갈아서 임명하였다. 이때 명칭이 개정된 읍수는 218군현으로서 종전의 9주 5소경을 위시한 전국의 대읍은 물론 일부의 소현까지 미치고 있다.

마치 본관이 국가에 의하여 정해지듯이, 고려왕조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적극 참여했던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이 제각기 출신지 군현에 토성으로 지정되면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들은 이때를 기하여 시작되었다.

940년 이전에 폐합된 군현에는 토성이 없으며, 또한 그때까지 토착씨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지역, 즉 신라 말의 북쪽 국경선인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북지방(평안 · 함경도)에는 토성이 전무하였다.

대소읍 사이에 영속관계(領屬關係)가 형성되어 갔듯이, 기존의 토성은 본읍의 읍치를 중심으로 점차 임내와 직촌(直村)으로 확산되어 감으로써 성씨의 분화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즉, 토성 다음에 가속성(加屬姓) · 입주후성(立州後姓) · 차성(次姓) · 차리성(次吏姓) 등이 생기게 되었다. 본읍 성씨와는 별도로 속현 및 향 · 소 · 부곡 · 처(處) · 장(莊)성과 촌락을 본관으로 하는 촌성이 시간적 선후를 두고 계속해서 생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조에 의거 당시 본관으로 존재했던 구역을 통계하면, 주읍 331, 속현 72, 폐현 141, 합계 544읍은 신라시대의 9주 소관 450읍에 후대 북진정책에 따라 양계(兩界)의 신설 주진이 가산된 것이며, 일부 군현은 종래의 향 · 소 · 부곡에서 승격되었다.

군현을 제외한 특수본관을 통계해 보면 부곡 377, 향 130, 소 243, 처 35, 장 9개 소나 되었다. 이들 구역에도 당초에는 각기 토성이 존재하였다가 그 뒤 임내의 소멸과 함께 토착씨족이 유망되어 15세기 이후에는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군현과 향 · 소 · 부곡은 고려 초기 이래 승격과 강등, 병합과 폐합, 영속의 변동, 임내의 직촌화 등의 변동은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원구역만은 좀처럼 쉽게 분해되지 않고 16세기까지 존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 구역에는 각기 토박이 성씨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위 지리지 편찬자들은 각 읍 성씨조를 정리하면서 그 폐읍이나 향 · 소 · 부곡 등은 비록 이미 혁파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곳 성씨의 출자지, 즉 본관을 밝혀야 하였기 때문에, 이미 혁파되고 직촌이 된 구역들로 각 읍의 고적조에 기재하였다.

본관인 읍격의 높고 낮음은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세의 대소강약과 대체로 비례하였다. 여기에서 비로소 본관의 우열이 나오게 되었다. 고려 초기 이래 인구증가에 따른 신생촌락의 계속적인 발생은 주읍토성의 임내성화를 촉진시켜 본관의 세분화와 다양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의하여 붙여진 본관은 그 바탕이 된 구역의 성격에 따라 격차가 있게 되고 신분과 직역(職役)에 따라 본관이 가지는 의미는 서로 달랐다. 읍격이 높은 토성이나 기성 명문대족은 그 본관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는가 하면, 섬이나 역 · 진 또는 향 · 소 · 부곡을 본관으로 한 사람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그 본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국가에 조세 · 공부 · 역역(力役)을 지고 있는 일반 양민들은 그 거주지를 각기 본관으로 해서 편호(編戶)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로부터 확인받고 있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민을 파악하는 데는 항상 혈연과 지연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즉, 호적제도를 마련하여 국민을 지역별 · 계층별로 호적에 등재함으로써, 한편에서는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징세 · 조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정한 지역에 일정한 신분의 주민을 긴박시킴으로써 주민의 유망을 방지하고, 직역부과는 물론 임관 · 선군에도 활용했던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각 읍 성씨조는 바로 고려시대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제된 성씨체계의 구체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하였던 고려시대의 성과 본관은 후기 이래 시대적 · 사회적 변동에 따라 지역적인 편제와 신분구조에 획기적인 변혁을 초래하였다.

임내의 승격과 소속의 변동, 향 · 소 · 부곡의 승격과 소멸, 행정구획의 개편과 폐합, 즉 성이 딛고 선 본관의 개편과 변질이 획기적으로 가해지면서 15세기 말부터는 세분된 본관이 점차 주읍(主邑)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즉 촌과 향 · 소 · 부곡 등이 소속군현에 폐합되듯이, 종래의 촌성과 향성 · 소성 · 부곡성이 군현성에 흡수되어 갔고, 향 · 소 · 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어 갔듯이,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 병합되어 갔다.

그 결과 15세기 지리지에 실려 있던 폐현 · 촌 · 향 · 소 · 부곡 · 처 · 장 · 역 등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대부분 소속 주읍성에 흡수되거나 주읍을 새 본관으로 개정하게 되고, 15세기까지 존재했던 임내성의 본관은 대부분 사문화(死文化)되었으며, 일반 양민 · 천민들은 현 거주지에서 편호됨으로써 앞 지리지에 없던 새로운 본관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17세기 이후의 울산 · 대구 · 단성 · 언양 등의 호적대장에서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한국 성씨체계의 특징은 일찍이 중국의 것을 수용하면서 발전해 왔고,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 성씨 가운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주 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러한 추세는 후삼국시대 지배계층인 호족에 미쳐 사성 · 모성 · 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고, 고려 초기 태조 왕건에 의하여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이 분정되면서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 · 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조선 후기 사회변동으로 인하여 천민층의 신분해방과 함께 무성층이 새로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고, 신분질서의 해이에 따른 위조족보가 대량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무명성씨나 신흥세력들은 다투어 기성의 대성명문에 투탁함으로써 기존의 대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희성 · 벽관(僻貫)이나 현조(顯祖)를 확보하지 못한 무명의 성씨들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한말을 거치면서 모든 한국인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었고, 모든 성씨가 양반성씨로 되어 갔던 것이다.

성씨의 유래와 보급과정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 고대 씨족사회에는 아직 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가령,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인들이 우리의 토착사회에서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족내혼(族內婚)을 하지 않는 풍속을 보고 그 일정한 집단을 동성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확실히 알고 아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거나 부계거나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이처럼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 강 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각각 강수(姜水)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강씨와 희씨로 하였던 것이며, 성자 자체가 여성에서 나온 것처럼 중국 초기의 성자에는 여자(女字)변을 딴 글자가 많았다.

우리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 『삼국유사』 등 우리의 옛 사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朱蒙)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夫餘氏)라 하였다 한다.

또한 신라는 박 · 석 · 김 3성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이사금 때 6부(촌)에 이 · 최 · 정 · 손 · 설 · 배씨 6성을 주었다고 하며,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용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540∼576)에 건립한 4개 순수비, 진지왕 3년(578)과 진평왕 때(579∼632)에 각각 건립한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등 7세기 이전의 금석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 역사상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성을 사용하였는데 『삼국사기』와 『당서(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구려는 해(解) · 을(乙) · 예(禮) · 송(松) · 목(穆) · 우(于) · 주(周) · 마(馬) · 손(孫) · 창(倉) · 동(董) · 예(芮) · 연(淵) · 명림(明臨) · 을지(乙支) 등 10여 종, 백제는 사(沙) · 연(燕) · 협(劦) · 해(解) · 진(眞) · 국(國) · 목(木) · 백(苩)의 8대성과 왕(王) · 장(張) · 사마(司馬) · 수미(首彌) · 고이(古爾) · 흑치(黑齒) 등 10여 종, 신라는 3성(박 · 석 · 김)과 6성(이 · 최 · 정 · 손 · 배 · 설) 및 장(張) · 요(姚) 등 10여 종에 불과하다.

고대 중국의 경우, 성은 천자가 내리는 것이며, 제후의 경우 그 출생지에 연유하여 성을 주고 그 봉지(封地, 采邑)에 연유하여 씨를 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사성할 수 없으므로 그 지족(支族)인 공손(公孫)들은 그 왕부(王父)의 자(字)로써 씨를 삼았다 한다. 또 관직자나 치읍자(治邑者)는 세공(世功)이 있을 때 그 관직명이나 고을 이름으로 씨를 삼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의 성씨 사여(姓氏賜與)는 우선 국왕의 지배를 전제로 그 영역 내의 인민을 출생의 지연에 따라 성별을 나누되, 다시 일족을 이룰 만한 지배세력에게는 씨를 명함으로써 그 족계(族系)를 분명히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건국기의 성씨 사여는 국왕을 전제로 제도화한 감이 있다는 점, 그 수성자(受姓者)들에게 정치적 배려가 주어지며, 또 그들 각자가 연고지가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 당시 상황이 아직은 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것은 곧 그 정치적 지배조직과 좀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 · 백제 · 신라 할 것 없이 고대국가 체제정비기에 사성은 부제(部制)개편, 관등설정 등과 함께 국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의 정치적 편성의 한 방법이었음을 예상하게 한다.

신라시대 성씨 취득과정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박 · 김 · 석 · 신김씨와 같이 중고 왕실지배층의 성씨 취득, 삼국통일 전후의 6부 사성 및 나당(羅唐)관계에서 견당사신(遣唐使臣) · 견당유학 · 숙위학생 · 입당수도승, 기타 중국에 내왕한 인사( 장보고張保皐 · 정년鄭年 등)들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성씨 취득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성씨 취득은 주위 여러 집단에 대한 배타적 집단을 의미하였고, 특히 성씨를 획득함으로써 정치적 · 사회적 특권이 예상되었다.

둘째, 전통적 친족출계관념, 즉 신라 고유의 출자관념은 부계나 모계 또는 양계출자(兩系出自)라는 한정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성원권의 획득에 있어서 부계 · 모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나 변경할 수 있는 융통성이 존재했던 사회였고, 성씨를 취득함으로써 출자율이 부계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셋째, 성씨를 취득하는 집단은 족적 관념의 변질 및 혈족 자체 내의 극심한 변동으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사실상 족단 또는 친족공동체라는 용어로서의 의미는 사라질 만큼 해체되었다.

성을 최초로 지닌 집단은 왕실 · 귀족과 같이, 성이 골(骨) · 족(族)과 관련되면서 최상층 지배집단에서 비롯되었다. 6부성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의 성씨 취득이 통일과정과 그 뒤 국가체제의 재정비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각 족단의 세력변동을 단계적으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들 집단의 성씨 취득과 등장이 비단 6부성에 그치지 않고 신라 하대로 갈수록 현저히 많은 성이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음은 6성 사성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단계적이고 계기적임을 시사한다.

우리나라의 중국식 한자성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왕실부터 시작해서 귀족 · 관료 · 양민 및 천민순으로 보급되어 갔다. 7세기 초부터 신라의 종성인 김씨 · 박씨가 『구당서』 · 『신당서』에 나온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金眞平)이며, 국인에는 김 · 박 양성이 많고 이성(異姓)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6성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 · 손 · 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런데 3성 또는 6성이 한성화(漢性化)한 시기는 비록 7세기 이후라 하더라도 그 씨족적 유래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데서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폭넓게 계승되지는 못하였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시대부터 한자성이 보급되어 갔다.

7세기 후반부터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진골육두품 계층은 점차 한성을 수용했던 것이며, 또한 신라는 통일 후 9주와 5소경에 왕경의 귀족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결과 이미 한성화한 중앙의 귀족과 관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지방에 확산된 중앙 귀족 · 관인은 한성화 전에 이주한 자와 한성화 뒤에 이주한 자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王大妃) 또는 왕비(王妃)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성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 가운데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보낸 외교문서 사이에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 · 신씨(申氏) · 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씨 표기방식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어 왕실은 근친혼을 계속하면서 동성의 왕비로 하여금 모성 또는 외조모성을 따르게 했던 것이며, 그러한 관념이 지배층에 보급되자 성과 본관의 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득성 사실과 시조 유래에 관한 신화 · 전설 · 민담 등 설화는 상고시대의 건국신화 외에도 각 가문의 가첩 · 족보 등에서 구전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건국신화 겸 시조설화로는 혁거세(赫居世) · 탈해(脫解) · 알지(閼智) · 수로왕, 제주의 고(高) · 양(良) · 부(夫) 3성시조설화가 있다.

신화는 신성시되는 이야기라는 입장에서 본 것이며 신성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거나 존재하는 것을 포괄적 · 규범적 의미를 가지도록 차원을 높여 나타내는 현상이라는 관점과 주인공의 숭고하고 위대한 행위로써 성립된다는 이론에 근거한다.

신라의 박 · 석 · 김씨 시조의 3성신화를 대비하여 볼 때, 각 신화가 가지는 화소(motif)가 공통되는 면도 보이고 있으나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보인다. 그것은 제의론적(祭儀論的) 측면에서도 각 족단이 소유한 신앙대상과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 신화의 화소를 비교해 보면, 첫째 동일 화소로서는 ① 태어나자 부모로부터 유기됨, ② 유기 후 짐승들로부터 보호를 받거나 도움을 받음, ③ 사람에게 구출되어 양육됨, ④ 모두 신화와 관련되는 성을 가진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둘째 이질적인 화소로는 ‘난생(卵生), 왕자로 태어남, 꿰짝 속에 들어 있음, 표류되어 왔음, 특이한 여자와 결혼, 죽은 뒤에 신이 됨’ 등이 있다.

이들 신화는 그 자체로서는 허구이지만, 우리의 상고사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부족의 이동이나 형성,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 원시민간신앙 등을 아울러 반영하고 있다.

이들 시조설화는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난생설화를 가진 혁거세 · 탈해 · 수로왕의 경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족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알영(閼英)이나 허황후(許皇后) 또는 제주 삼을나(三乙那)의 배필이 된 처녀들은 바다를 건너왔거나 아니면 우물과 관련된 지신족임을 나타내고 있다.

상자 속에 담겨 표류하다가 노파에 의해 건져지고 수양되는 탈해의 전승은 후세의 시조설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파평 윤씨 · 강화 봉씨의 시조와 남평 문씨의 시조는 각기 연못에서 석함에 담겨진 상태로 노파에 의하여 발견되거나 바다 위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탄생에는 대개 구름과 안개 또는 천둥과 번개가 개재되어 더욱 신이한 것으로 수식되었다.

또 황간 견씨의 시조 견훤(甄萱)은 여인과 지렁이와의 교배에 의하여 태어나고 호랑이에 의하여 길러진다. 이런 이물교혼담(異物交婚譚)은 우리 민담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신라의 시조설화는 민간신앙과도 결부되어 지금도 영남지방에는 ‘골맥이’라는 동신제가 전승되고 있다. 여기에는 성씨가 붙어서 ‘골맥이김씨할배’ · ‘골맥이이씨할매’ 등으로 불리는데, 이때의 김씨할배는 그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시조신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의 인물인 신숭겸(申崇謙) · 김홍술(金洪術) · 김인훈(金忍訓) · 손긍훈(孫兢訓) · 박영규(朴英規)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각기 출신지인 곡성 · 의성 · 양산 · 밀양 · 순천의 성황신(城隍神)으로 기재된 것이 그 예이다.

또 남부지방에는 이른바 ‘조상단지’나 ‘삼신바가지’라는 단지에 쌀 · 보리 등을 넣어 방안 시렁 위에 모시는 풍습이 있는데, 이 쌀알은 조령(祖靈)을 상징한다. 알지(閼智)신화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는 금궤(金櫃)는 바로 이 조상단지의 신화적 반영이며, 계림(鷄林)은 곧 ‘골맥이제당’이었다.

신라에서 출자한 3성과 6성의 시조와 같이 고대에 등장하는 족장들은 다같이 천강설화(天降說話)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전승은 고려 · 조선시대까지로 면면히 이어져, 현존하는 대성들의 시조 또는 원조로서 숭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마다 제향이 베풀어지고 있다.

또한, 이천 서씨의 시조 신일(神逸)이 사냥꾼으로부터 사슴을 구하고, 문화 유씨의 유효금(柳孝金)이 범의 목구멍에 걸린 여자의 은비녀를 제거해 줌으로써 각각 신령이 꿈에 나타나 보은을 약속한 데서 그 자손들은 음덕을 받아 대대로 현달하였다는 설화는 후삼국시대 이래 고려 · 조선의 성씨 관계자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시조 또는 조상의 비상한 은공과 효성에 감복한 신령(산신령과 같음)이 그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음덕을 입게 하였다는 것이다.

후삼국시대 지방호족의 성씨 취득은 지방사회 자체 내에서의 성장과 신라 중앙문화의 지방 확산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배경과 신라 하대 중앙통제력의 점진적인 약화라는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일찍부터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한 중앙귀족의 후예들과 신라 하대 재래의 토착촌주층이 중심이 되어 이 시대의 정치적 · 사회적 변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지방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었다.

그들은 신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면서 재래의 군현조직과 촌주층의 직제를 통하여 지방행정 말단에 참여해 온 경험과 발달된 중앙관제의 영향 속에서 중앙관제에 버금가는 스스로의 관반(官班)을 형성하고 주민을 통치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군현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통일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군현토성을 분정하였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 · 성씨록의 편찬 · 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 · 沈 · 河 · 玉 · 明 · 俊 · 昔 · 諸 · 益 · 森 · 邦 · 芳 · 價 · 勝 · 濯 · 承氏)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정초는 그의 서문에서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 · 읍(邑) · 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 · 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성자는 바로 이렇게 생성된 중국의 것을 모방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박 · 석 · 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래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이중환(李重煥)『택리지(擇里志)』에서 우리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락국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첫째,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 · 개국공신 및 귀순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둘째, 신라의 3성과 6성 등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의 한성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성명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고유명을 가진 인물이 관료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성종(10세기 말) 이후가 되면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까지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다.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 · 분파 등을 통해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위 지리지에 의거하여 15세기에 존재하였던 우리 성씨의 종류와 본관수의 도별 통계는 〈표 1〉과 같다.

도별\성종 · 본관수 토성 망(토)성 내(망래)성 속성 촌(망촌)성 입진성 입(망입)성 사성 합계
경기도 242 162 37 35 10 · · · 486
충청도 305 98 33 81 49 · · 1 567
경상도 561 15 131 172 28 · · 4 911
전라도 656 69 37 99 2 · · · 863
황해도 100 82 51 53 16 · · · 302
강원도 107 82 25 87 · · · 3 304
평안도 10 · 21 14 · 389 · · 434
함경도 98 57 46 24 17 15 332 · 589
합계 2,079 565 381 565 122 404 332 8 4,457
〈표 1〉 성씨의 도별 · 성종별 본관수
*자료 : 세종실록 지리지

이에 의거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종(姓種)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본관에 의한 구분:주성(州姓) · 부성(府姓) · 군성(郡姓) · 현성(縣姓) · 촌성(村姓) · 외촌성(外村姓) · 부곡성(部曲姓) · 향성(鄕姓) · 소성(所姓) · 처성(處姓) · 장성(莊姓) · 역성(驛姓) · 수성(戌姓).

② 성씨의 출자에 의한 구분:천강성(天降姓) · 토성(土姓) · 차성(次姓) · 인리성(人吏姓) · 차리성(次吏姓) · 백성성(百姓姓) · 입주후성(立州後姓) · 입현후성(立縣後姓) · 가속성(加屬姓).

③ 성의 소멸과 이동에 의한 구분:망성(亡姓) · 망촌락성(亡村落姓) · 경래성(京來姓) · 내성(來姓) · 입성(入姓) · 입진성(入鎭姓) · 속성(續姓) · 망래성(亡來姓) · 망입성(亡入姓).

④ 사성 및 귀화성에 의한 구분:사성(賜姓) · 당래성(唐來姓) · 향국입성(向國入姓) · 투화성(投化姓).

역사상 우리 나라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 향 · 소 · 부곡민, 역 · 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은 그만큼 많았다. 16세기 말부터 시대적 · 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갖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당시 사회계층을 크게 양반 · 중인 · 상민 · 천민으로 나눌 때, 양반층은 일찍이 군현토성에서 귀족과 관인을 배출한 사족(士族) 가문이며, 중인층은 군현과 임내의 이족(吏族)에서 서리 · 기술직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의 서얼 출신이 여기에 해당된다. 상민층은 고려 이래 관인을 내지 못한 일반 농민층으로서 성종상 백성성 · 촌성 · 향 · 소 · 부곡성 출신이 많았다.

천민은 대체로 무성층이었다. 최하층인 이들은 조선 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인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 · 계급이 타파되며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는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갖게끔 법제화되었다.

상당수였던 무성인이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가지 희화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담당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였는가 하면,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또 주위에 많은 김 · 이 · 박 등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함으로써 종전의 대성 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갔다. 가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으로 정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의 희성 · 벽관 가운데는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하고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기재하면서 한자의 획(劃)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국민 모두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시기는 신분과 계급제도가 타파된 한말에 와서 단행된 것이며, 그것이 일제의 식민통치과정에서 시행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우리의 성씨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무엇보다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겠다. 이는 대륙침략과 미일전쟁을 전개하던 일제의 발악적인 마지막 식민통치 수단으로, 이른바 그들이 부르짖은 내선일체 · 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인 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한 일이다.

성이란 일생토록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관념이 철저한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제적인 창씨개명에 그대로 순종할 리 없었고, 그래서 웃지도 보지도 못할 허다한 희비극이 연출되었다. 그때 각 씨족 문중은 회의를 열어 창씨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하여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의 흔적을 남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가령 이가(李家) · 김본(金本) · 배정(裵井) · 오산(吳山) · 장전(張田) 하는 식으로 본성을 표시하였는가 하면, 남양(南陽) · 수원(水原) · 경산(京山) · 광산(光山) 하는 식으로 본관을 그대로 성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시조전설이나 연고지를 상징화하여 성으로 쓴 일도 많았다. 가령, 파평 윤씨의 경우 평소(平沼)라 하였는가 하면, 한산 이씨는 본관에다 목은(牧隱:李穡)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목산(牧山)이라 하였고, 청주 한씨는 청주의 고호인 서원(西原)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이러한 일본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 · 서양자(婿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며 일제하의 창씨개명으로 인한 일본식 씨명은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한편, 성자에 의한 우리 성의 수는 성씨관계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250여개의 성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다.

1486년(성종 17)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성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망성 포함)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이 나오는 데 비하여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모든 성을 거의 망라하였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한성화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후대까지 존속된 성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198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성세(姓勢)와 본관수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김 · 이 · 박씨 등과 같이 대성일수록 본관수가 많았다. 이의현은 『도곡집』의 「도곡총설」에서 우리의 성 298성을 그 성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저성(著姓):李 · 金 · 朴 · 鄭 · 尹 · 崔 · 柳 · 洪 · 申 · 權 · 趙 · 韓(12성).

② 그 다음 저성:吳 · 姜 · 沈 · 安 · 許 · 張 · 閔 · 任 · 南 · 徐 · 具 · 成 · 宋 · 兪 · 元 · 黃(16성).

③ 그 다음 다음 저성:曺 · 林 · 呂 · 梁 · 禹 · 羅 · 孫 · 盧 · 魚 · 睦 · 蔡 · 辛 · 丁 · 裵 · 孟 · 郭 · 卞 · 邊 · 愼 · 慶 · 白 · 全 · 康 · 嚴 · 高(25성).

④ 희성(稀姓):田 · 玄 · 文 · 尙 · 河 · 蘇 · 池 · 奇 · 陳 · 庾 · 琴 · 吉 · 延 · 朱 · 周 · 廉 · 潘 · 房 · 方 · 孔 · 偰 · 王 · 劉 · 秦 · 卓 · 咸 · 楊 · 薛 · 奉 · 太 · 馬 · 表 · 殷 · 余 · 卜 · 芮 · 牟 · 魯 · 玉 · 丘 · 宣 (41성).

⑤ 그 다음 희성:都 · 蔣 · 陸 · 魏 · 車 · 邢 · 韋 · 唐 · 仇 · 邕 · 明 · 莊 · 葉(섭) · 皮 · 甘 · 鞠 · 承 · 公 · 石(19성).

⑥ 벽성(僻姓):印 · 昔 · 龔 · 杜 · 智 · 甄 · 於 · 晉 · 伍 · 拓 · 夜 · 賓 · 門 · 于 · 秋 · 桓 · 胡 · 雙 · 伊 · 榮 · 思 · 邵 · 貢 · 史 · 異 · 陶 · 龐 · 溫 · 陰 · 龍 · 諸 · 夫 · 景 · 强 · 扈 · 錢 · 桂 · 簡(38성).

⑦ 그 다음 벽성[貴姓]:段 · 彭 · 范 · 千 · 片 · 葛 · 頓 · 乃 · 間 · 路 · 平 · 馮 · 翁 · 童 · 鍾 · 酆 · 宗 · 江 · 蒙 · 董 · 陽 · 章 · 桑 · 萇 · 程 · 荊 · 耿 · 敬 · 寗 · 京 · 荀 · 井 · 原 · 袁 · 萬 · 班 · 員 · 堅 · 騫 · 燕 · 時 · 傅 · 瞿 · 嵇 · 米 · 艾 · 梅 · 雷 · 柴 · 聶 · 包 · 何 · 和 · 賀 · 花 · 華 · 賈 · 夏 · 麻 · 牛 · 僧 · 俊 · 曲 · 栢 · 翟 · 畢 · 谷 · 弓 · 種 · 邦 · 凉 · 良 · 芳 · 卿 · 刑 · 永 · 乘 · 登 · 昇 · 勝 · 信 · 順 · 侯 · 藩 · 端 · 鮮 · 芊 · 牙 · 水 · 彌 · 吾 · 珠 · 斧 · 甫 · 部 · 素 · 附 · 凡 · 固 · 台 · 才 · 對 · 標 · 肖 · 那 · 瓜 · 化 · 壽 · 祐 · 價 · 尋 · 森 · 占 · 汎 · 克 · 郁 · 翌 · 宅 · 直 · 則 · 澤 · 綠 · 赫 · 冊 · 濯 · 骨 · 燭 · 律 · 物 · 別 · 實 · 弼 · 合 · 乜 · 鴌 · 揚(136성).

⑧ 복성(復姓):南宮 · 皇甫 · 鮮于 · 石抹 · 扶餘 · 獨孤 · 令狐 · 東方 · 西門 · 司馬 · 司空(11성).

이상 298성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250여 성과 『동국여지승람』 270여 성 및 그 뒤 귀화성이 모두 합산된 것으로 조선 후기에 이미 소멸된 망성이 많이 포함되었다. 성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늘고 줄게 마련이어서 옛날에 있던 성이 뒤에 소멸되기도 하고 과거에 없던 성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15세기 이래 현재까지 우리 나라의 성수는 대략 250성 내외가 되었는데, 송나라 소사(邵思)의 『성해(姓解)』에 의하면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568성이나 되며,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중일 양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성종은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 성 가운데 김 · 이 · 박 · 최 · 정씨 등 5대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성씨에 대한 전체조사가 최초로 실시된 시기는 1930년도인데 이때 전국에 250성이 있음이 국세조사에서 밝혀졌다. 8 · 15광복 후 최초의 성씨조사는 1960년도 인구센서스의 부대조사로 실시되었는데, 30년 전의 조사보다 8종이 많은 258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의 조사는 북한지역이 제외된 남한만의 조사라는 데서 1930년도의 조사결과와는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

남북분단에 따른 대규모 인구이동으로 인하여 남북한의 성씨 구성에도 변동이 컸다. 남한지역에만 사는 성씨가 있는가 하면 북한에만 있는 성씨도 많다.

1985년 11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를 실시하면서 성씨와 본관을 조사한 결과 1975년도의 247성에 비하여 25성이 새로 추가되어 274성에다 본관은 3,435개로 나타났다. 성씨별 인구수는 〈표 2〉와 같으며, ☆표 성은 1975년 이후에 새로 나타난 성이다.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1 8,785,554 52 97,634 103 10,279 154 1,381 205 230 256 ☆13
2 5,985,037 53 97,412 104 10,069 155 1,364 206 229 257 ☆10
3 3,435,640 54 81,416 105 9,243 156 1,351 207 229 258 9
4 1,913,322 55 81,267 106 8,696 157 1,265 208 109 259 ☆8
5 1,780,648 56 72,382 107 8,660 158 990 209 198 260 ☆5
6 958,163 57 72,148 108 8,565 159 978 210 196 261 ☆5
7 877,050 58 69.776 109 皇甫 8,529 160 956 211 189 262 綱切 ☆5
8 834,081 59 65,186 110 7,959 161 943 212 179 263 ☆5
9 810,231 60 64,143 111 7,888 162 932 213 177 264 ☆5
10 672,755 61 54,472 112 7,406 163 901 214 東方 174 265 ☆3
11 628,388 62 54,445 113 7,370 164 873 215 165 266 ☆3
12 620,950 63 50,379 114 7,088 165 824 216 156 267 椿 ☆3
13 619,615 64 48,914 115 5,945 166 794 217 154 268 $ 2
14 611,148 65 48,626 116 5,440 167 700 218 154 269 ☆1
15 567,768 66 46,528 117 5,430 168 700 219 141 270 ☆1
16 564,265 67 40,709 118 5,241 169 獨孤 695 220 140 271 岡田 ☆1
17 557,137 68 40,387 119 5,076 170 687 221 137 272 小峰 ☆1
18 556,391 69 39,709 120 5,028 171 648 222 136 273 長谷 ☆1
19 509,077 70 34,262 121 5,012 172 643 223 133 274 ☆1
20 457,567 71 33,664 122 4,644 173 621 224 西 129
21 430,055 72 33,220 123 4,522 174 604 225 122
22 384,012 73 30,930 124 4,395 175 567 226 113
23 375,765 74 30,864 125 4,329 176 527 227 110
24 368,717 75 27,852 126 3,691 177 520 228 106
25 343,985 76 24,562 127 諸葛 3,652 178 499 229 104
26 323,004 77 24,257 128 司空 3,634 179 464 230 100
27 309,572 78 23,371 129 3,529 180 459 231 94
28 304,810 79 22,689 130 3,046 181 452 232 93
29 264,228 80 22,519 131 鮮于 3,032 182 450 233 87
30 222,246 81 21,548 132 3,021 183 449 234 87
31 219,737 82 20,377 133 3,018 184 427 235 85
32 218,445 83 20,355 134 2,866 185 424 236 83
33 196,284 84 20,194 135 2,748 186 398 237 80
34 184,621 85 18,837 136 2,647 187 381 238 68
35 168,078 86 18,278 137 2,471 188 359 239 68
36 165,381 87 17,635 138 西門 2,328 189 359 240 ☆66
37 163,513 88 17,392 139 2,300 190 328 241 59
38 163,413 89 16,938 140 2,297 191 326 242 56
39 159,679 90 16,435 141 2,203 192 315 243 55
40 157,526 91 南宮 16,227 142 2,117 193 310 244 ☆52
41 155,456 92 16,106 143 2,074 194 308 245 51
42 153,474 93 16,037 144 1,990 195 307 246 ☆51
43 150,008 94 15,527 145 1,952 196 282 247 ☆46
44 147,694 95 15,349 146 1,881 197 275 248 37
45 146,662 96 14,733 147 1,862 198 270 249 36
46 141,328 97 13,626 148 1,856 199 258 250 30
47 137,839 98 13,264 149 1,538 200 249 251 25
48 125,624 99 12,320 150 1,527 201 243 252 ☆17
49 123,087 100 10,937 151 1,511 202 238 253 ☆16
50 116,002 101 10,859 152 1,487 203 238 254 ☆14
51 104,472 102 10,069 153 1,484 204 232 255 ☆14
〈표 2〉 전국 성씨와 인구(북한지역 제외)
*자료 : 인구센서스(경제기획원, 1985).

인구 100명 미만의 희귀 성씨 40여 개는 호적기재 착오로 인한 경우와 고아 출신이 입적하거나 외국인의 귀화 때 생겨나는 등 최근에 만들어졌다.

이 조사에서 나타난 10대 성씨의 본관수를 보면 김씨가 285, 이씨 241, 박씨 128, 최씨 127, 정씨 122, 강씨 33, 조(趙)씨 56, 윤씨 44, 장(張)씨 63, 임(林)씨 60개로 각각 집계되며 국내 30개 대본관의 순위와 인구수를 들면 〈표 3〉과 같다.

순위 본관 인구
1 김해김씨 3,767
2 밀양박씨 2,705
3 전주이씨 2,308
4 경주김씨 1,523
5 경주이씨 1,217
6 진주강씨 921
7 경주최씨 876
8 광산김씨 751
9 파평윤씨 647
10 청주한씨 598
11 안동권씨 559
12 인동장씨 539
13 평산신씨 460
14 김녕김씨 424
15 순흥안씨 418
16 동래정씨 415
17 안동김씨 398
17 달성서씨 398
18 남양홍씨 382
19 해주오씨 377
20 남평문씨 344
21 전주최씨 343
22 제주고씨 318
23 경주정씨 301
24 창녕조씨 300
25 수원백씨 296
26 한양조씨 273
27 나주임씨 263
28 문화유씨 256
29 밀양손씨 243
30 영일정씨 237
〈표 3〉 본관별 인구 (단위 : 천명)

성과 본관

씨성(氏姓) 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자지인 본관을 의미하고 있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우리의 성씨 체계 가운데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요,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도 많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동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동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이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이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등 8가지 경우가 있다.

본관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첫째 성을 사용하기 전인 7세기 이전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거주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신라의 6부 같은)을 하였으며, 둘째 본관이란 시조의 출신지 또는 그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킨 것이며, 셋째 신라 말 고려 초 이후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이족의 동성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족의 표시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므로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징세 · 조역의 필요상 일반 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입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 · 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 · 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이다.

이에 의거 본관의 지역적 성분을 고려하여 정리하면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씨 체계가 확립된 고려 초기부터 15세기 지리지가 편찬될 때까지 모든 성은 본관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즉, 주 · 부 · 군 · 현 · 진 · 촌 및 향 · 소 · 부곡 · 처 · 장 · 역 · 수 등 시조의 출신지나 주민의 거주지별로 각기 본관이 구분되어 있었다.

구분 지역
州 · 府 · 郡 楊州·開城·廣州·驪州·陽根·利川·貞州·瑞原·坡平·安峽·水原·南原·安城·鐵原·長湍·富平·江華·仁川·黃州·瑞興·鳳山·遂安·谷山·海州·長煙·平山·白川·載寧·信川·延安·豊川·文化·忠州·淸州·洪州·鎭川·天安·舒川·公州·沃川·瑞山·永同·林川·慶州·密陽·梁山·蔚山·淸道·安東·寧海·醴泉·榮川·永川·星州·草溪·善山·陜川·晋州·金海·大邱·順興·尙州·金山·咸安·咸陽·全州·羅州·錦山·靈光·靈巖·南原·長興·潭陽·順天·濟州·益山·金堤·淳昌·光州·寶城·江陵·原州·春川·寧越·三陟·淮陽·旌善·杆城·高城·平壤·祥原·慈山·成川·肅川·順川·安州·价川·德川·郭山·隨川·嘉山·博川·寧邊·宣川·雲山·泰川·鐵山·定州·熙州·義州·麟山·龍川·朔州·昌城·碧潼·江界·安邊·宣川·預原·文川·高原·永興·定平·咸興·北靑·端川·吉州·鍾城·富寧·三水(130개 본관)
衿川·見州·豊壤·安山·陽川·金浦·守安·童城·砥平·幸州·交何·深岳·臨津·龍駒·陽城·僧嶺·河陰·德水·喬桐·陰竹·果川·川寧·沙川·高峰·富原·積城·抱川·加平·朝宗·雙阜·永新·貞松·龍城·廣德·載陽·處仁·陽智·朔寧·永平·臨江·松林·麻田·連川·鎭江·通津·俠溪·永康·牛峰·免山·鐵和·安岳·新恩·三支·甕津·白翎·江陰·靑松·嘉禾·海安·殷栗·連豊·陰城·木川·竹山·全義·韓山·扶餘·沔川·大興·定山·丹陽·淸風·文義·稷山·平澤·溫水·新昌·藍浦·德山·靑陽·結城·市津·翼安·槐山·延豊·堤川·永春·靑川·安邑·利山·陽山·靑塘·道安·燕岐·慶陽·牙山·黃澗·懷仁·報恩·靑山·新豊·儒城·德津·德恩·庇仁·鴻山·連山·懷德·石城·鎭岑·尼山·新平·黎陽·興陽·合德·泰安·貞海·餘美·唐津·禮山·保寧·延日·東萊·仁同·海平·高靈·龍宮·安康·杞溪·興海·壽城·河濱·慶山·昌寧·彦陽·長鬐·靈山·玄風·臨何·豊山·加利·一直·甘泉·英陽·多仁·靑鳧·禮安·河陽·殷豊·基川·奉化·岳溪·眞寶·北屋·八莒·開寧·咸昌·義昌·會原·固城·巨濟·泗川·居昌·江東·江城·漆原·利安·宣寧·中牟·山陽·永順·神光·慈仁·豊角·守山·鮮顔·東平·機張·桂城·淸河·吉安·奈城·春陽·才山·靑杞·新寧·松生·安德·盈德·宣仁·若木·義興·安貞·靑理·化寧·丹密·功城·花園·治爈·禦海·聞慶·加恩·虎溪·軍威·孝靈·知禮·班城·永善·岳陽·熊神·莞浦·昆明·蘭浦·平山·松邊·加祚·溟珍·丹溪·龜山·山陰·减陰·山岐·嘉樹·新繁·鎭海·沃溝·高山·耽津·茂松·南平·務安·高敞·興德·光陽·珍山·萬頃·龍安·扶寧·泰山·礪山·押海·潘南·會津·海南·道康·長沙·雲峰·長水·樂安·高興·綾城·和順·同福·玉果·古阜·咸悅·居寧·遂寧·伊城·利城·沃野·紆州·伉山·富利·平皐·金溝·巨野·富潤·臨陂·澮尾·保安·井邑·仁義·朗山·榮山·安老·伏龍·艅艎·長山·珍島·昆湄·黃原·玉泉·森溪·臨淄·大昌·咸豊·牟平·海際·長城·復興·赤城·龍潭·求禮·任實·九臯·長溪·茂豊·朱溪·鎭安·馬靈·會寧·長澤·荳原·栗原·鹿水·突山·富有·南陽·泰江·豊安·道化·福城·昌平·珍原·橫城·平昌·平康·平海·蔚珍·通川·羽溪·連谷·襄陽·洞山·酒泉·洪川·和川·水入·文登·嵐谷·長楊·金城·通溝·岐城·金化·伊川·基麟·狼川·楊口·方山·麟歸·瑞和·烈山·安昌·臨道·碧山·雲嵓·歙谷·中和·三和·龍岡·江西·咸從·三登·江東·順安·永淸·通海·孟山·定寧·汶山·翼谷·瑞谷·鶴浦·衛山·派川·霜陰·福令·永豊·鎭溟(370개 본관)
長命·寧遠·陽巖·樹德·安戎·定戎·寧德·寧朔·威遠·龍津·元興·宣德·雲林·隘守·靜邊·寧仁·長平·耀德(18개 본관)
金津村·古等村·八谷村·上樹介村(경상도지리지)
部 曲 內彌·亡沙梁·爭忽·甘彌呑·高安·秋溪·所仍林·甘彌·廣反石·德興·毛山·神宗·楓谷·仰岩·金化·林堰·酒城 ·$釜·貴知·廣炤·仁政·助立·聖淵·鹽率·仇史·北安谷·竹長·省法伊·豆也保·今音勿·伊冬音·甲火·仇知山·南界·小川·皆丹·召羅·石保·寶進·高林·勿也·買吐·春甘·巴叱·新平·長川·連山·茂林·平安·緋山·道開·加德·高雅·助馬·月伊谷·頭衣谷·大山·川邑·坤義·皆品·正首·黑石·毛助·雨日·大栗·桃平·公村·皮堤·居平·極浦·任城·群山·金磨·孫利·松旨·懷義·深井·陳良·弘農·貢牙·水雲·永可·多慶·大良坪·波等村·醉仁·栗谷·阿麻·貞石·嘉音·梨村·竹靑·栗村·進禮·赤良·召羅浦·下伊沙·別良·良苽·慶旨·碧津·也村·紆州·古多山·群智·葱谷·長平·金山·又刀谷(109개 본관)
石淺·工二·柱石·盆村·浮石·黃魚·海寧·德山·周岸·頓義·德泉·彩雲·良化·福平·廣地·來進·延命·福山·松慈·多音·曲山·鹿鳴·砥山·景明·富安·荒調·水金·鳴良·堤見·從政·鼓村·從南·北平·鎭南·平德·永豊·甲鄕·南調·北調·銅鄕·南田·本井·三日浦·正方·於沙·甲鄕·興福·馬良(48개 본관)
於上川·椒子·拜音·栗谷·界銀·古多只·林述·猪井·安眼·禾邊·寺谷·文石·居邊·資己·冬老·安心·代如谷·馬淺·加乙山·楮旨·豆毛村·陽良·金岩·大谷·安城·橫川·德林·馬川·才南·櫟陽·尼波山·大谷·大口·七良·水多·陶城·柳等村·放光·楊等良·陽岳·利方·骨若·豆仍只·加用·品魚·所乙呑·史丁·新村(48개 본관)
奢井·今勿村·楡梯·楊干·深谷(5개 본관)
迷原·五朶·宗德·新永·松庄·買浦·化物·萬珍·寺伊岩(9개 본관)
德留·昌德·六驛·維鳩·平川·貞民·續驛(7개 본관)
鐵垣·禾登·押戎(3개 본관)
〈표 4〉 본관의 지역적 성분

이는 조선 초기 신분제도의 재편성과 행정구획의 개편에 따라 현 이상의 군현을 본관으로 한 것만 남고, 진 · 촌 · 향 · 소 · 부곡 등 임내와 특수지역을 본관으로 한 것은 그 구역의 직촌화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 · 벽성과 함께 천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士族)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 간 반면, 관인이나 현조를 내지 못한 본관은 개관(改貫)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는 본관수가 수십이 넘던 성 가운데 조(曺)는 창녕 조씨, 한(韓)은 청주 한씨, 심(沈)은 청송 심씨, 문(文)은 남평 문씨 하는 식으로 본관의 개변이 많았다.

우리의 성씨는 16세기부터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드문 반면 본관을 개변하는 경우는 많았다. 왜냐하면,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문의 품격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군현 향리의 사족화에 따라 본관의 개변이 자행되었고, 왜란 · 호란 후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安), 공씨는 곡부(曲阜), 천씨는 영양(穎陽)으로 바꾸는 예가 있었다.

성씨 관계 자료와 족보

우리나라에서는 성씨 관계자료가 고려시대부터 단편적으로 나타나지만, 한자성씨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는 사마천(司馬遷) 부자가 재래의 세본(世本)과 주보(周譜)를 근거로 하여 『사기(史記)』를 편찬한 데서 성씨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사기』는 그 본기 · 세가 · 열전 등에서 등장인물의 계보적 서술이 상세하였고, 그것을 모방한 후대의 역대 정사(正史)들은 『사기』의 그러한 서술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한서(漢書)』의 ‘「고금인표(古今人表)」’, 『위서』의 관씨지(官氏志), 『신당서』의 「종실 · 재상세계표(宗室宰相世系表)」 등은 각기 당대의 관계인사의 성씨 · 관향 유래와 이민족의 한성화(漢姓化) 및 종실 · 재상 가문의 계보적 서술을 하였다.

후한 말부터 문벌사회가 성립되고 곧 이어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실시되자 군현성씨의 가격등제(價格等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뒤 위진남북조와 수당시대를 경과하면서 신분제의 재편성과 이민족의 한화(漢化)에서 성씨의 개편이 수반되었다.

그 결과 각종 보첩류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수서(隋書)』 경적지의 보계편과 『구당서』 · 『신당서』의 예문지 보첩류편에는 이른바 후위의 방사격(方司格), 당의 씨족지를 비롯하여 각종 족보 · 가보류가 실렸다.

중국의 세본과 같은 제왕의 계보는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각기 국사를 편찬하는 가운데 작성되었다고 짐작되며,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에 의하여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으로도 나타났다. 그것은 다시 『삼국사기』 본기와 연표 및 『삼국유사』의 왕력조(王曆條)에서 삼국 내지 가락국의 왕실 계보로 체계화되었다.

신라와 후삼국시대의 인물 성씨를 기재한 자료는 정사의 열전과 비문이 있다. 최치원 · 최언위(崔彦撝) 등 육두품 출신 문사들에 의한 승려들의 비문에는 우리의 성씨가 주로 중국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152년에 작성된 김의원(金義元)의 묘지(墓誌)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고 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보첩과 같은 것은 없었다.

문종 이후 고려의 문벌귀족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씨족 · 가보 · 가첩 · 세보 · 족보 등의 용어는 있어 왔지만, 이들 보첩류는 15세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족보와는 성질이 달랐다.

중국에서 구품중정법 실시와 군현성의 성립에 따라 벼슬과 혼인에 인물과 가격을 결정하는 보첩류가 쏟아져 나왔듯이, 고려에서도 문음(門蔭)을 받기 위한 조상의 내외세계가 기재된 씨족 · 족도(族圖) · 정안(政案) 등이 작성되었고, 지방의 각 읍사에는 향리의 명부인 이안(吏案, 壇案)이 비치되어 향리의 선임과 승진, 향공(鄕貢)과 기인(其人)의 선임등에 활용했다.

거기에는 그들의 내외세계와 가격의 고하 및 개별적인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각 읍 향리의 족파(族派)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각 읍별로 향내 사족을 망라한 향안(鄕案)이 유향소나 향교에 비치되었던 사실과 비교된다.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 관계자료인 고적(古籍)은 바로 고려 이래 당시까지 중앙과 지방에 전래되고 있던 문서였던 것이다.

성씨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최초의 자료는 위 지리지를 비롯한 『경상도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조이다. 이상의 세 지리지의 성씨조는 그 기재양식이 약간씩 상이하여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각 읍 성씨 가운데 전자에 누락된 것이 후자에 기재되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으며, 성종 표기에도 상이한 점이 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있는 인리성 · 백성성 · 속성 등이 없고 그 기재 형태가 고졸하여 세련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후자는 당대 최고의 문사들을 동원하여 고려시대부터 전래된 고적과 전자를 비롯한 팔도지리지 및 『주관육익(周官六翼)』 등을 참고 · 종합 · 정리하여 각 읍 성씨의 내부구조와 그 변화과정을 체계화했다.

성종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성씨조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토성 · 차성 · 인리성 · 차리성 · 백성성 · 입주후성 · 입현후성 등의 용어가 없어지고, 단지 본관을 본읍과 임내로 구분, 기재하였고, 특히 망성을 토성과 혼효(混淆)하여 기재하였다.

그 편찬자의 주해처럼 이 지리지의 성씨조는 『주관육익』 · 『세종실록』 지리지 · 『경상 · 전라관풍안(慶尙全羅觀風案)』에 의거 편찬했던 것이며, 이래(移來)한 성씨에 대해서는 본관을 세자(細字)로 주기하되 본관을 모를 때는 성자 밑에 ‘내(來)’ · ‘속(續)’ · ‘속(屬)’자를 주기하였다.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시대의 진전에 따른 성씨 관념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며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의 대종을 이루었던 ‘토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것은, 당시 양반사족의 본관이 거주지와 분리되는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종래 토착적 의미의 토성은 무의미해지고, 그 대신 성의 출자와 지망(地望) 내지 문벌을 추상적으로 의미하는 본관만이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국여지승람』 성씨조는 그 기재 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비하여 훨씬 후퇴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물조와 고적조를 대폭 강화하여 그 본관 출신의 인물과 각 성의 본관을 기재함으로써 후대 읍지와 족보 및 『증보문헌비고』 씨족조에서 인용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최초의 성씨관계 단행본이라고 사료되는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은 1467년(세조 13) 왕명을 받은 양성지(梁誠之)에 의하여 찬진되었으나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단지 당의 씨족지 · 성씨록을 모방하여 우리의 성씨를 각 군현별로 정리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사가의 족보편찬에 앞서 조선왕조의 왕실에서는 1412년(태종 12)에 『선원록(璿源錄)』 · 『종친록(宗親錄)』 · 『유부록(類附錄)』이 작성되었는데, 이는 태종이 서얼차대법을 제정하고 난 다음 종실에서도 적서(嫡庶)를 명확히 구분하여 명분을 바로잡겠다는 의도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왕실에서는 『국조보첩(國朝譜牒)』 · 『당대선원록(當代璿源錄)』 · 『열성팔고조도(列聖八高祖圖)』 등을 종부시(宗簿寺)에서 편찬, 비치하고, 돈녕부(敦寧府)에서는 외척과 부마를 대상으로 한 돈녕보첩(敦寧譜牒)을 편찬하였는가 하면, 충훈부(忠勳府)충익부(忠翊府)에서는 각기 역대 공신원종공신들의 족보를 작성, 비치하였다.

왕실과 관부의 이러한 보첩편찬은 사가의 족보편찬에 하나의 촉진제가 되었다. 우리의 족보사상 판각, 성책해서 반포한 것은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성종 7, 1476)가 최초이다. 나머지 명문들의 족보는 주로 구보(舊譜)의 서문에 나타나는 사실로서, 초고 또는 족도 · 세계도 · 가첩 형식으로 전해오다가 16세기 또는 17세기에 와서 족보를 정식 간행할 때 전재되었다.

『안동권씨성화보』가 발간된 뒤 족보 편찬은 오랫동안 중단상태에 있다가 1565년(명종 20)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가 간행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여러 성씨의 족보가 이에 힘입어 작성되었다.”는 김안국(金安國)의 말과 같이, 권씨 · 유씨의 족보는 조선 전기 여러 성씨의 족보편찬에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이들 족보는 자녀의 기재를 출생순으로 하되 부→자로 이어지는 친손계는 물론, 부→여로 이어진 외손계까지 대수에 관계없이 등재하였으니, 이는 바로 당대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족보편찬은 18세기 이후처럼 친손들이 주관하지 않고 친손과 외손들이 합작하였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족보는 17세기 후반부터 가족제도 · 상속제도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변모해 갔다. 16세기 이래 민중의 성장에 따른 천민층의 양민화와 왜란호란을 겪고 신분질서가 크게 해이해지자 전통적인 양반과 신흥세력을 막론하고 모두 세계 · 족계를 새로 정리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17세기 후반부터 족보가 속간되었다.

조선 후기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이 심하였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대동보적 성격을 띤 족보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실제 혈연적으로 관계없는 타성이 동성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래 같은 조상에서 나온 파계가 사족과 이족 또는 성장과 진출의 선후에 따라 서로 타성으로 오인되는 예도 많았다.

그 결과 희성 · 벽관들은 비교적 순수성을 지녔으나 대성 · 명문일수록 투탁자가 급증하였고 한말 · 일제강점기로 내려오면서 모든 성씨가 양반성화하면서 족보편찬도 일반화되었다.

현대사회의 성씨

성과 씨가 전근대사회에서는 신분과 특권을 표시했거나 존칭 또는 비칭으로 사용되어, 가령 이씨 · 김씨라 할 때는 양반신분을 뜻하나 이성 · 김성 또는 이가 · 김가라 할 때는 상민 이하의 신분을 지칭하였다.

또는 유성자가 역적이나 모역과 같은 죄를 범하면 신분이 곧 천인으로 전락되기 때문에 성을 쓸 수 없었고, 불교의 승려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였다는 데서 역시 성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계층과 직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고 있다. 성씨 관념과 관련있는 관습과 민속이 많다. 가령, 자녀혼인에 있어 어떤 성을 선호하는 대신 특정한 성은 금기하는 관행이 있으며, 일년간의 신수를 점칠 때나 토정비결 같은 것을 볼 때도 접촉하는 사람의 성씨에 따라 이해득실이 있다는 것이다.

성씨는 일찍부터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분화, 발전해 왔는가 하면 신분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무성에서 유성으로, 또한 유성층에서 무성층이 되기도 하였다.

성씨는 당초 왕실부터 시작하여 귀족 · 관인 · 양민 · 천민순으로 보급되어 갔기 때문에, 신성시 또는 특권시되어 득성 유래와 시조의 출자에 관해서는 신화와 민담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성씨에 관한 속담도 비교적 많다. 가령, 조선시대 이래 ‘성불변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져 온 우리나라에서 맹세 또는 굳은 약속을 할 때 ‘성을 갈겠다.’는 말을 한다든지, 근대 이후 성이 일반화되자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름도 성도 모른다.’라 한다든지, 우리의 성 가운데 김씨와 이씨가 절대 다수라는 데서 ‘촌놈 성 김가 아니면 이가다.’라든지, 또는 ‘김씨가 한몫 끼지 않은 우물은 없다.’라는 속담들이 있다.

또한, 상대방과의 수인사에서 성씨를 묻는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화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머슴살이 삼년에 주인 성 묻는다.’, ‘한 집안의 김별감성을 모른다.’, ‘10년을 같이 산 시어미 성도 모른다.’는 등의 속담도 있다.

또한, 성에 따라 별명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성의 출자와 유래 또는 시조나 조상에 관한 일, 또는 발음이나 어휘에 따라 박씨는 ‘말’, 정(鄭)씨는 ‘당나귀’, 정(丁)씨는 ‘곰배’, 홍씨는 ‘물렁감’ 하는 식의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성과 본에 관한 법적 규정은 재래의 관습인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하고 있다. 「민법」에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며,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창설하고 일가를 창립한다. 그러나 성과 본을 창설한 뒤 부 또는 모를 알게 된 때에는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781조).”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듯 우리나라의 성은 원칙적으로 부계혈통을 표시하며, 성의 변경은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일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혼인하여 부부가 되더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성을 바꾸지 않으며 각자의 성을 가진다.

그러나 「민법」은 입부혼인제도(入夫婚姻制度)를 인정하고 이 경우에 한하여 입부혼인에 의한 출생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함으로써(826조 4항), 모계혈통을 표시하는 성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서양자(壻養子:데릴사위)의 자의 성과 본에 대해서는 별도로 규정하는 바 없으므로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서양자는 입부혼인의 경우와 같이 부(夫)가 처가에 입양하여 그 출생자는 모가, 즉 양가에 입적할 뿐만 아니라 호주상속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성(異姓)양자의 성과 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성불변의 원칙상 변경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구관습법에는 서양자는 허용하지 않았으나, 신민법은 이를 창설하여 남자 없는 가족을 위하여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남독녀가 호주 또는 호주상속인인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입부혼인을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부혼인을 한 경우에는 부부는 처의 주소나 거소에서 동거해야 하며, 그 부부 사이의 출생자녀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의 가에 입적한다(826조).

아동복지시책으로서의 고아입양문제와 함께 최근 새로운 형식의 입양은, 양친됨에는 기혼 · 미혼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며(866조), 양자됨에 있어서도 남녀 · 소목(昭穆)을 가리지 않음(877조)은 물론, 이성양자까지도 인정하여 전통적인 입양과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나, 양부모의 입양목적에는 별로 큰 변동이 없다.

자녀 없는 양부모가 가계를 잇기 위한 것이 주된 입양목적이기 때문에 현대적 입양 역시 남아가 더 많이 입양되고 있으며, 양자의 성이 무엇이었든 간에 양친의 호적에 기재되는 양자의 성과 본은 양부와 동일해야 한다는 뜻에서 친생자로서 신고되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동성불혼’ · ‘이성불양’의 관습하에 윤리적 또는 우생학적 견지에서 동성동본간 금혼제가 철저히 지켜졌으나, 현재와 같이 인구의 급증과 이동, 산업화와 도시화로 종래 한 부락에 살던 동족이 사방으로 이산되고 김해 김씨 · 전주 이씨 · 밀양 박씨 등 수백 만이 넘는 동성자가 시조를 같이한다고 하여 촌수를 가릴 것 없이 그 사이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남녀평등을 기조로 한 현대사회에서 모계혈족에 대해서는 최근친을 제외하고는 혼인을 방임하면서 부계혈족에 대해서는 촌수의 제한 없이 금혼하는 것은 일종의 남녀차별이다.

최근 이름의 한글화와 함께 성씨의 한글화도 장차 거론되겠지만, 성자의 한글표기에 있어 ‘리(李)’ · ‘류(柳)’로 하는 씨족이 있어 두음법칙에 어긋나는 예가 있듯이, 성은 이름과 달라서 성을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성씨에 관한 최초의 구체적인 자료는 세종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로서 성씨의 내부구조와 시대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반면, 18세기 이후에 쏟아져 나온 각 성씨 족보들은 당대인의 수록에도 개관(改貫), 투탁한 예가 많았던 것은 물론, 특히 시조의 유래와 조상의 계보에는 조작과 분식(粉飾)이 가해져 오히려 성씨의 발생과 분화 및 발전과정을 구명하는 데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일제시대 성의 연혁과 당시의 성에 관한 연구 · 조사서로는 총독부 중추원 발행의 『조선의 성명씨족에 관한 연구조사(朝鮮の姓名氏族に關する硏究調査)』와 국세조사과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朝鮮の姓)』이 있다.

1930년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검토는 식민통치하에 우리나라의 특징적인 현상이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동족부락의 성격을 보다 조직적으로 파악하려는 데 궁극적 목표가 있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사회구조 · 사회변동과 같은 사회사를 살피는 한 과정으로서 족적 문제와 관련하여 성씨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으며, 고려 · 조선시대 연구에 있어서는 정치적 · 사회적 지배세력의 형성과 내부구조 및 소장관계를 성씨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문화류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도곡총설(陶谷叢說)』
『앙엽기(盎葉記)』(이덕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한국가족제도연구』(김두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
『우리 나라 민법상의 성씨제도연구』(이광신, 법문사, 1973)
『한국인의 성씨』(이승우, 창조사, 1977)
『한국중세사회사연구』(이수건, 일조각, 1984)
『朝鮮の姓名氏族に關する硏究調査』(今村革丙, 朝鮮總督府, 1934)
『朝鮮の姓』(朝鮮總督府, 1934)
「고구려 건국기의 성씨사여」(김광수, 『김철준박사화갑기념한국사논총』, 지식산업사, 1983)
「신라시대 성씨취득과 그 의미」(이순근, 『한국사론』 6,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0)
「토성연구기일(土姓硏究其一)」(이수건, 『동양문화』 16, 영남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1975)
「한국에 있어서의 가계기록의 역사와 그 해석」(송준호, 『역사학보』 87,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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