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 ()

불교
인물
조선 전기, 『고봉법장가집』을 저술하고 송광사를 중창한 승려.
이칭
이명
지숭(志崇)
고봉(高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50년(충정왕 2)
사망 연도
1428년(세종 10)
본관
신주(愼州)
주요 저서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
관련 사건
송광사 중창
내용 요약

고봉 법장(高峰法藏)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선종의 승려이다. 조선 초기 송광사를 중창한 공으로 송광사 16국사로 추숭되었으며, 수선사 16세 사주(社主)로도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나옹 삼가(懶翁三歌)를 게송으로 풀이한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이 있다.

정의
조선 전기, 『고봉법장가집』을 저술하고 송광사를 중창한 승려.
주요활동

법장은 20세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승과(僧科)에 급제한 뒤 주2를 버리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으며, 나옹 혜근(懶翁惠勤)을 스승으로 삼고 그 법맥을 이었다. 머리카락을 항상 두 주22가량 기르고 바리[鉢盂][^1] 하나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며, 풀피리를 자주 불어 사람들은 그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30년 동안 주3을 찾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경상북도 안동의 청량산에 청량암(淸凉庵)을 짓고 선정을 닦았다.

1395년(태조 4) 법장은 남쪽 지방의 여러 산을 돌아다니다 낙안(樂安) 금화산(金華山)에 묵던 중 꿈 속에서 한 사찰을 보았다. 다음날 우연히 송광사(松廣寺)에 이르렀는데 꿈에 본 사찰과 같았다. 이에 그는 제자들과 함께 송광사를 새로 일으켜 옛 모습대로 완전히 복원할 것을 서원하였다. 1399년(정종 1) 정종에게 송광사의 중창을 허락을 받고, 1400년(정종 2) 국가의 힘을 빌려 건물 30채를 지었다. 그 뒤 김해 신어산(神魚山) 각암(覺庵), 경주 원원사(遠願寺), 울산 태원암(太元庵) 등에 머물다가 1414년(태종 14)에 송광사로 돌아왔다. 1420년(세종 2) 송광사 주지가 된 제자 중인(中印)이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사찰의 증축을 시작하였다. 이에 법장은 방문(榜文)을 지어 낙성회(落成會)를 베풀고 중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1428년(세종 10) 음력 7월 11일 병을 얻었으나 평소의 의식을 그대로 행하다가 21일 주5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신찬(信贊), 혜성(惠性), 상제(尙濟), 홍인(洪仁) 등이 있다.

학문과 저술

법장은 출가 후 나옹 혜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법장은 1404년(태종 4) 각암(覺庵), 1423년(세종 5) 경주 원원사(遠源寺), 1426년(세종 8) 송광사에 머물 때 꿈에서 혜근을 만날 정도로 나옹 혜근의 계승자임을 주6하였다. 그가 지은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은 나옹 혜근이 지은 「완주가(玩珠歌)」, 「고해가(枯骸歌)」, 「백납가(白衲歌)」, 즉 나옹삼가(懶翁三歌)의 구절마다 게송을 붙인 것으로 「완주가」 300구, 「고루가」 144구, 「백납가」 200구의 장편으로 이루어진 저서이다.

상훈과 추모

1428년(세종 10) 법장이 입적하자 화장을 한 뒤 그의 유골을 함에 담아 침실에 안치하였다. 이때 사리가 여러 차례 주7하는 이적(異跡, 주8이 일어났다. 이후 법장의 사리를 곳곳에 공양하고, 수정통에 담아 다시 백동으로 만든 통에 넣고 푸른 명주로 감싼 뒤 부도주9하였다. 그의 부도는 유언에 따라 3년 뒤 만들어졌다. 법장의 제자들은 1430년(세종 12) 겨울 송광사 북쪽 청진암(淸眞庵) 터에 부도를 조성하고 주11주12 등을 개최하였으며, 주13를 열어 승려 280여 명을 공양하고 왕을 축원하는 법회를 열었다. 1431년(세종 13) 법장의 제자인 상제가 법장의 행장(行狀)을 적은 현판을 만들어 동쪽 주15에 걸어두었다. 행장 뒤의 주17주16은 육미(六眉)가 기록하였다. 세월이 흘러 상제가 만든 현판이 너무 낡자 1774년(영조 50) 최눌(最訥)이 이를 교정하고 글을 바로잡아 새로이 행장을 지었다. 법장은 송광사를 중창한 공으로 송광사 16국사에 주20되었으며, 그의 주19순천 송광사 국사전(國師殿)에 안치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曹溪高僧傳』

단행본

이능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신문관, 1918)
조명제 외, 『역주 조계산 송광사사고 인물부』(혜안, 2007)
주석
주1

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팎에 칠을 한다. 우리말샘

주2

명예와 이익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

이름난 산과 큰 절. 우리말샘

주5

십이시(十二時)의 셋째 시. 오전 세시에서 다섯 시까지이다. 우리말샘

주6

임무를 자기가 스스로 맡음. 우리말샘

주7

하나의 주체에서 갈라져 나온 것. 우리말샘

주8

기이한 행적. 우리말샘

주9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심. 우리말샘

주11

미륵을 절에 봉안하여 기원하는 법회. 우리말샘

주12

성범(聖凡)ㆍ도속(道俗)ㆍ귀천ㆍ상하의 구별 없이 일체 평등으로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행하는 대법회. 우리말샘

주13

승려들이 음력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일정한 곳에 머물며 수도(修道)하는 일. 우리말샘

주15

화상(和尙), 국사(國師) 등의 고승(高僧)이 거처하는 처소. 우리말샘

주16

불법에 관한 논의. 우리말샘

주17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우리말샘

주19

주로 얼굴을 그린 화상(畫像). 또는 얼굴을 찍은 사진. 우리말샘

주20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 우리말샘

주21

승려가 되는 사람에게 종문(宗門)에서 지어 주는 이름. 우리말샘

주22

길이의 단위. 한 치는 한 자의 10분의 1 또는 약 3.03cm에 해당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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