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명종 15) 약포(藥圃) 정탁(鄭琢)에게 『상서(尙書)』를 배웠고, 1563년에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64년 향시(鄕試)에 입격하였고, 다음 해 밀양박씨와 혼인하였다.
1568년(선조 1) 동료들과 단속사(斷俗寺)에서 『삼가귀감(三家龜鑑)』의 목판 및 오백나한(五百羅漢)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불태웠다.
그리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가 『상서』를 배운 조식의 문인이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교유하였다. 응석사(凝石寺), 쌍계사(雙磎寺)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1581년(선조 14)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방문하였다. 1582년 곽재우(郭再祐), 이대기(李大期)와 사굴사(闍崛寺)에서 공부한 후 1585년 진주로 돌아왔다.
1600년 부사정(浮査亭)과 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하였다. 1609년( 광해군 1)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613년 별시(別試) 동당(東堂)에 장원급제하여 상경했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하였다. 다음 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에 대하여 상소한 정온(鄭蘊)이 하옥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위해 의령소회(宜寧疏會)에 참여하였다.
1616년 금산동약(琴山洞約)을 만들고, 양몽재(養蒙齋)와 지학재(志學齋)를 세워 후학을 교육하였다. 같은 해 가을, 정대순(鄭大淳), 박민(朴敏), 문홍운(文弘運), 이중훈(李重勳)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32년 11월 부사정 양직당(養直堂)에서 사망하였다.
1622년 『진양지(晉陽志)』를 편찬하였고, 1632년 「침상단편(枕上斷編)」과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을 편찬하였다. 1785년(정조 9) 후손 성동익(成東益) 등이 안정복(安鼎福)의 서문을 받아 문집을 간행하였다.
1719년(숙종 45)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위판이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