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新)나라 왕망(王莽)은 흉노 정벌을 위하여 고구려 군대를 강제로 동원하였다. 그러나 마지못해서 출동한 고구려 군대는 신나라 진영에서 도망나와 오히려 중국 현도군(玄菟郡)의 변경을 습격하였다. 이 때 고구려 군대를 추격하던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에 왕망은 엄우(嚴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때 고구려 장수 연비가 엄우의 신나라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목은 장안(長安)에 전하여졌다.
그런데 『한서(漢書)』 왕망전과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엄우에게 피살된 사람이 ‘구려후 추(句驪侯騶)’라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의 이칭이 추모왕(鄒牟王)이기 때문에 이 ‘추(騶)’가 고구려 주몽왕이나 유리왕을 가리키는 것이라 간주하기도 한다. 반면 『삼국사기』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는 당시 중국 측이 고구려 장군인 연비를 고구려왕으로 과장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 이후 왕망은 독존적인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따라 서기 12년에 고구려왕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낮추어 불렀다. 반면에 중국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