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유교 경전 주석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시대 12세기 초에 김인존(金仁存)이 지은 『논어신의(論語新義)』와 윤언이(尹彦頤)의 『역해(易解)』가 이보다 앞서 있었던 경전 주석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권근은 익주(益州: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서 유배 생활을 마치고 40세 때인 1391년(공양왕 3)충주로 돌아와 『역』·『시』·『서』·『춘추』를 ‘역설(易說)’·‘시설(詩說)’·‘서설(書說)’·‘춘추설(春秋說)’의 명칭으로 주석해 『천견록』을 저술하였다. 이어서 『예경절차고증(禮經節次考證)』의 저술에 착수하여 54세 때인 1405년(태종 5)에 『예기천견록』으로 완성함으로써 『오경천견록』의 저술을 완성하였다.
『예기천견록』은 11책(초간본 10책) 26권의 방대한 규모로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주역천견록』은 3책(상경·하경·계사)의 필사본인데 여러 해 전에 발견되어 유일본으로서 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체 16쪽밖에 안 되는 『시천견록』과 전부 30쪽밖에 안 되는 『서천견록』은 필사본으로 합본되어 전해지며, 197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춘추천견록』은 단지 4쪽인 간략한 분량의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권근은 『오경천견록』을 저술하기 직전인 1390년에 저술한 『입학도설(入學圖說)』에서 ‘오경체용합일지도(五經體用合一之圖)’와 ‘오경각분체용지도(五經各分體用之圖)’를 통해 성리학의 체용론적(體用論的) 논리로 오경의 구조를 제시하였다. 곧 오경의 본체(全體)를 ‘역’이라 하고 응용(大用)을 ‘춘추’로 파악하는 체계적 인식을 보여 주었다.
『오경천견록』은 도학적 경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기존 업적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와 창의적 해석의 시도를 통해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매우 독자적인 경전 주석의 입장을 보여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권근이 『오경천견록』을 저술했다는 사실은 한국 유학의 경학적 신기원을 열어 주는 의미 깊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유학에서 독자적 경학이 성립함으로써, 한국 유학 자체의 독립된 학통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