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강상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중국 요령성 대련시(大連市) 감정자구(甘井子區)에 있는 청동기시대 돌무지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강상묘(崗上墓)
내용 요약

요령 강상 유적은 중국 요령성 대련시 감정자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돌무지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이 무덤은 모두 23기가 발견되었으며 크고 작은 돌담에 의해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뉜다. 동쪽이 가장 크고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서쪽에 2개의 소형 돌담구역이 있다. 유물은 비파형동검과 같은 각종 무기류와 대롱구슬 등 장신구들이 많다. 이 유적은 묘축조집단의 수장인 제7호 묘광 피장자와 그를 배출한 혈연집단의 집단무덤으로 추측된다. 이 유적들은 고조선의 이른 시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정의
중국 요령성 대련시(大連市) 감정자구(甘井子區)에 있는 청동기시대 돌무지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강상은 동서 길이 약 100m의 둥근 언덕으로 유적은 바로 이 언덕 위에 위치한다. 1964년 조중발굴대(朝中發掘隊)가 발굴하였다. 무덤은 언덕 위에 돌담을 쌓고 그 위에 검은흙이 섞인 자갈로 봉분을 씌운 것으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으나 비교적 양호하다. 장방형의 묘역은 동서 길이 28m, 남북 길이 20m 정도의 범위이고, 크고 작은 돌담에 의해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뉜다. 3개 구역 중 동쪽 구역이 제일 커서 구릉의 중심 대부분을 점유하였으며, 그것의 서쪽에 소형의 돌담 구역이 2개 부설되어 있다.

내용

묘광들은 모두 23기가 발견되었는데, 축조재료에 따라 5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유형은 석판바닥의 묘광이며, 둘째 유형은 석판벽 묘광이며, 셋째 유형은 구운 흙덩이바닥 묘광이며, 넷째 유형은 자갈묘광이며, 다섯째 유형은 토광이다.

묘광 중 가장 큰 제7호 묘광을 비롯해 제19호와 제6호 묘광은 모두 첫째 유형에 속한다. 이 중 제7호 묘광은 가장 큰 구역의 중심에 위치한다. 약 2m 주위에 원형의 돌줄을 돌리고, 여기서 다시 방사상의 돌줄이 묘역의 가장자리까지 닿아 있는데, 그 중간에 15기의 묘광이 배치되어 있다.

23기의 묘광 중 후세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제2·12·23호 묘광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장(火葬)한 것으로 인골이 불에 탔고 묘광에 그을린 흔적이 보인다. 하나의 묘광에 여러 개체분의 인골이 쌓여 있었으며, 이들 인골은 거의 전부가 머리방향이 엇바뀌어 놓여 있었다. 또한 인골들은 어른과 어린이의 것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인골을 가장 많이 출토한 제19호 묘광에서는 18구가, 23기 묘광 전체에서는 인골 144구 이상을 확인하였다.

유물은 토기·석기·청동기·골기 등 다양하다. 특히,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대롱구슬을 비롯한 장신구들이 많다. 토기로는 갈색·회갈색의 단지·대접·굽접시 등이 있다. 청동기로는 비파형동검·창·청동팔찌·비녀 등이 있고, 석기로는 화살촉·거푸집·곤봉두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의 대다수는 묘광 내에 있었고 일부만이 묘광의 윗부분에 있었다.

특징

강상묘의 중심묘광인 제7호묘 주위에 여타의 묘광들이 둘러싸고 있다. 한동안 이를 두고, 제7호묘의 피장자를 위해, 여타 묘광이 순장당한 자의 무덤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강상묘의 순장묘적 성격에 대해 최근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하고 있다.

① 23기의 묘광은 중심묘광인 제7호묘가 만들어질 때 모두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서쪽의 두 개의 작은 구역은 대형 묘역이 완성된 후 부가된 것으로 제7호묘보다 후대의 것이다.

② 개개 묘광내에 불에 타고 뒤엉켜 있는 인골 개체수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동일 개체의 편수를 중복 계산할 가능성이 있는데, 묘광 면적에 비해 인골의 개체수가 지나치게 많다.

③ 목이 잘리거나 양손이 결박당하거나 몸에 무기의 일부가 박혀있는 등등의 증거를 전혀 확인할 수 없어 매장된 사람들이 강제로 죽임을 당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④ 중심묘인 제7호묘에 비해 피순장자묘라고 추정하는 제6호·제19호 묘광의 규모와 축조시의 정성도가 제7호묘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⑤ 제7호 묘광의 부장품은 다른 묘광의 부장품에 비해 우월성과 집중도가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강상유적의 개개 묘광간의 관계는 비록 제7호묘가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노예소유자와 피순장자인 노예와의 관계로 치환시키기에는 근거가 미약하다. 그렇지만 강상유적 전체 피장자간에는 우열의 격차가 발생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 동인은 청동기문화의 발전으로 고조선사회의 계층분화와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강상유적은 묘축조집단의 수장인 제7호 묘광 피장자와 그를 배출한 혈연집단의 집단무덤이라 할 수 있다. 강상유적이라는 적석총의 존재는 묘축조집단 내에서도 기능상의 제분화 및 집단구성원 사이의 서열화가 진행, 그 축조집단 내에서의 수장과 그 혈연집단의 우월성이 이미 생겨났음을 보여 준다.

의의와 평가

이 유적은 구조·형식·매장풍습이 독특한 돌무지무덤으로 인근에 위치한 누상(樓上)유적과 구조가 기본적으로 같으며, 부장품도 서로 유사해 두 유적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두 유적은 순장묘로 보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이 유적들은 고조선의 이른 시기의 역사, 구체적으로는 요동반도에서 원시공동체적 관계가 깨져나가면서 고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강상유적의 연대에 대해 보고자들은 동검의 형식과 기타 유물로 미루어 대략 서기전 8∼6세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근 요령누상유적의 연대를 서기전 3세기 전후 또는 서기전 4∼3세기로 보는 견해도 있어 연대가 더 내려올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강인구, 학연문화사, 2001)
『중국동북지방의 유적발굴보고』(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사회과학원출판사, 1965)
「B.C. 1000년기 후반 적석총축조집단의 정치적 존재양식」(박경철, 『한국사연구』98, 1997)
「강상묘와 고조선사회」(권오영, 『고고역사학지』제9집, 1993)
집필자
이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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