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천축국(天竺國)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조사(義信祖師)가 552년(진흥왕 13)에 창건하였으며, 법주사의 창건보다 1년이 앞선다.
사찰명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로 이름 지었으나, 민족 항일기 때 일본인의 손에 용바위는 파괴되어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중창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신라 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잠시 머물러 용바위 위에 서서 신라의 서울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였다는 설과, 수많은 당우로 산야를 메웠던 사찰이 임진왜란의 병화로 폐허화되었다는 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이 절은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대웅전을 비롯한 요사채 3동을 중건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5종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화법이 정교한 후불탱화(後佛幀畵)와 1877년(고종 14)에 조성된 신중탱화(神衆幀畵)는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지정문화재로는 쌍석탑(雙石塔)과 마애불이 있다. 1974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옥천 용암사 쌍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며, 높이는 약 4m이다.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은 높이 3m에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한다.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의 공장(工匠)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