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술(而述). 윤절(尹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인교(尹仁敎)이다. 아버지는 윤동로(尹東輅)이며, 어머니는 이익주(李翊周)의 딸이다. 부인은 이하집(李夏集)의 딸이다.
1733년(영조 9) 성균관의 서재(西齋) 장의로 있을 때 왕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시학례(視學禮)를 베풀었다. 이 때 어전에 나아가 『서경』의 대우모(大禹謨)를 강론하였다. 강을 마친 뒤 왕에게 성균관에 대한 조정의 간섭을 비판하고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줄 것을 건의하자, 영조는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록에 선발되었고, 여러 차례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48년에는 충청도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민정을 시찰하였다. 세자시강원문학, 사헌부장령, 사간원헌납·사간, 홍문관교리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1751년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 뒤 홍문관수찬, 시강원익선, 겸사서, 함경도북평사, 홍무관교리, 시강원보덕 등을 두로 역임하고, 당상관인 승지로 발탁되었다. 1753년(영조 29) 시강원보덕 등을 두루 역임하고, 당상관인 승지로 발탁되었다.
신임옥사 때 목호룡(睦虎龍)의 고변과 관련하여 증직을 받은 외조 이익주(李翊周)의 벼슬을 호적에 기록한 일이 발각되어, 해남현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1758년 석방되었고, 1765년(영조 41) 왕이 서용을 명령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