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시강원익선, 함경도북평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술(而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06년(숙종 36)
사망 연도
1769년(영조 45)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사헌부장령|홍문관수찬|시강원익선|함경도북평사
정의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시강원익선, 함경도북평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술(而述). 윤절(尹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인교(尹仁敎)이다. 아버지는 윤동로(尹東輅)이며, 어머니는 이익주(李翊周)의 딸이다. 부인은 이하집(李夏集)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33년(영조 9) 성균관의 서재(西齋) 장의로 있을 때 왕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시학례(視學禮)를 베풀었다. 이 때 어전에 나아가 『서경』의 대우모(大禹謨)를 강론하였다. 강을 마친 뒤 왕에게 성균관에 대한 조정의 간섭을 비판하고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줄 것을 건의하자, 영조는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록에 선발되었고, 여러 차례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48년에는 충청도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민정을 시찰하였다. 세자시강원문학, 사헌부장령, 사간원헌납·사간, 홍문관교리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1751년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 뒤 홍문관수찬, 시강원익선, 겸사서, 함경도북평사, 홍무관교리, 시강원보덕 등을 두로 역임하고, 당상관인 승지로 발탁되었다. 1753년(영조 29) 시강원보덕 등을 두루 역임하고, 당상관인 승지로 발탁되었다.

신임옥사 때 목호룡(睦虎龍)의 고변과 관련하여 증직을 받은 외조 이익주(李翊周)의 벼슬을 호적에 기록한 일이 발각되어, 해남현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1758년 석방되었고, 1765년(영조 41) 왕이 서용을 명령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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