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양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황해도관찰사,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계화(季和)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0년(숙종 46)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해평(海平,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주요 관직
한성부좌윤|황해도관찰사|대사헌|공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에, 황해도관찰사,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계화(季和). 대제학·좌찬성을 지낸 윤순지(尹順之)의 현손이며, 윤전(尹塼)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세탁(尹世鐸)이고, 아버지는 윤항(尹沆)이다. 어머니는 송상증(宋相曾)의 딸이다. 부인은 박필로(朴弼老)의 딸이다. 대사간 윤득맹(尹得孟)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47년(영조 2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록에 올랐다. 다음해 세자시강원설서에 임용되었고, 한림(翰林: 검열로 왕명을 대필하는 문한직)에 선발되었다. 이 후 사간원정언·시강원사서, 홍문관부수찬·교리를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 이조참의 윤광의(尹光毅)가 우유부단하고 염치 없음을 탄핵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여러 번 왕의 어제(御製)를 필사하는 일을 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였을 때는 능의 지문도 썼다. 1758년 당상관에 진급하여 승지로 발탁되었고, 대사헌·참판 등을 지냈다. 1762년 나경언(羅景彦)의 고발로 사도세자의 사건이 났을 때는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취조에 참여하였고, 개성유수·대사헌이 되었다가 수안군수로 좌천되었다.

병조참판·도승지·형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1766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의 부사에 임명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1768년에는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진휼에 전심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대사헌·이조참판·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정조 즉위 후에는 대사헌을 지내다가, 1777년(정조 1) 공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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