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간원정언, 홍문관부교리, 함경도암행어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윤경(潤卿)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19년(숙종 45)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해평(海平,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주요 관직
세자시강원사서|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함경도암행어사
정의
조선 후기에, 사간원정언, 홍문관부교리, 함경도암행어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윤경(潤卿). 윤채(尹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세겸(尹世謙)이다. 아버지는 윤옥(尹沃)이며, 어머니는 이보명(李普溟)의 딸이다. 부인은 송창명(宋昌明)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1년(영조 27) 왕의 환후 회복과 왕세손의 책봉 등을 경축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홍문록에 올랐다. 다음해부터 세자시강원사서·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1754년에는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가 북청부사 윤붕거(尹鵬擧)와 문천군수 성헌조(成憲祖)의 비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이 해 유생들의 상소에 연명하였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다시 서용되어 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를 거쳐 1757년(영조 33) 당상관인 승지로 발탁되었다.

친구인 윤동승으로부터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서 언급되었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61년 지방관으로 서용되었다. 다음해 동래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비판을 받고 승지로 옮겼다. 일찍이 신치운(申致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이 김일경(金一鏡) 일파로 지목되어 처벌되었기 때문에 두고두고 공격을 받았다.

1763년 광주부윤에 임명되어 「유민도(流民圖)」와 서장대의 지형을 그려 올렸다. 1766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고 도승지에 임명되어 여러 해 왕의 측근에 있었다. 1772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영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