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간, 이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칭
군방(君房)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55년(효종 6)
사망 연도
1716년(숙종 42)
본관
남원(南原)
주요 관직
충청도관찰사|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강원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간, 이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군방(君房). 우부승지 윤길(尹日+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파주목사 윤형각(尹衡覺)이다. 아버지는 윤빈(尹彬)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관찰사 윤득열(尹得說)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홍명하(洪命夏)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87년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어전에서 사관으로 근무 중 왕명으로 사필(史筆)을 남에게 넘겨준 일로 비난을 받았다. 기사환국 이후 폐고되어 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용되어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지내면서 장희재(張希載)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1696년 홍문록에 선발되어 홍문관의 수찬·교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소론의 일원으로 노론과 자주 대립하였다. 1702년 과거(科擧)의 부정문제로 책임자인 소론의 오도일이 탄핵을 받았을 때 오도일을 변호하였고, 세자의 보호를 주장하던 강세구(姜世龜)를 두둔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705년 교리로 복직되었고, 사헌부장령·지평·집의, 세자시강보덕·필선, 사간원사간, 홍문관부응교, 의정부의 검상·사인 등을 거쳐 1706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다음해 내직으로 들어와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는 성균관의 노론계 학생들과 끊임없는 분쟁을 겪었다. 성균관의 식당에 여인들이 상을 차리는 것을 금지하고 남자 종으로 대신할 것을 주청하여 시행되었다. 1714년(숙종 40)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1716년에는 곤양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초계부사로 고쳐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오랫동안 청요직에 재직하면서 청렴하고 화평을 주장하여 평판이 높았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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