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술(士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2년(경종 2)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해평(海平,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주요 관직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교리|사헌부집의|강화부유수
정의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사술(士述). 윤언명(尹彦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득의(尹得義)이다. 아버지는 윤정동(尹鼎東)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대사간과 관찰사를 지낸 김성운(金聖運)의 딸이다. 부인은 이징규(李徵奎)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9년(영조 35) 성균관학생으로 있을 때 궁궐에서 왕이 직접 시행한 제술시험에 장원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혜택을 받았다.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선발되었고, 세자시강원설서·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64년(영조 40) 부수찬으로 있을 때 임금의 재계 중에 동료들과 소란을 피우다가 함께 갑산부로 유배 명을 받았으나 곧 서용되었다. 1765년(영조 41) 6월에는 임금이 진전(眞殿: 璿源殿(선원전)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셔두었음.)에서 재계하고 있을 때 공복을 벗고 부채질을 하다가 김포군으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서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보덕, 홍문관교리·수찬·부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고, 1773년(영조 49)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783년(정조 7) 호조참의를 지내고, 다음해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의 부사로 북경에 가서 건륭(乾隆) 황제가 직접 거행하는 석전(釋奠)과 경전의 강론을 참관하였다.

1785년(정조 9) 이후 오랫동안 대사헌을 지내면서 홍국영(洪國榮)의 잔당들과 왕족 이담(李湛)을 숙청할 것을 주장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강화부유수로 재직 중 방비 소홀로 왕족 죄인 이인(李䄄)이 탈출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로부터 처형하라는 명을 받았고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파직에 그쳤다. 사후 1801년(순조 1) 정순왕후의 명으로 복권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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