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도승지,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수보(受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4년(숙종 10)
사망 연도
1764년(영조 40)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도승지|예조참판|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보(受甫). 공조참의 윤민헌(尹民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강(尹絳)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윤지인(尹趾仁)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 이정영(李正英)의 딸이다. 부인은 조하기(曺夏奇)의 딸이다. 소론의 영수인 영의정 윤지완(尹趾完)의 조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2년(경종 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과 홍문록에 선발되었다. 사헌부지평이 되어 몇 차례 김일경(金一鏡) 일파를 탄핵하였다.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이광좌(李光佐)의 추천으로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경종이 죽은 뒤 행장찬집청 낭청이 되고,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 부수찬, 사간원헌납을 거쳐 1728년 형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731년 성천부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사간 한덕후(韓德厚)로부터 역적의 친척이라는 탄핵을 받았으나, 지평 김상중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1733년 당상관에 올라 승지가 되고, 대사간, 경연참찬관 등을 거쳐 1737년 강화유수로 나갔다. 다음 해부터 대사헌 · 대사간 · 병조참판 · 호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제언사 당상을 겸직했을 때는 궁가(宮家)의 제언(堤堰)의 절수(絶水) 폐단을 논하였다.

1739년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다음 해 도승지 · 예조참판을 거쳐 1741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함경도관찰사로 전보되었다. 이 때 함경도에 혹심한 기근이 들자, 조정에 주청해 삼남의 곡식을 운반해 진휼에 최선을 다하였다. 1744년(영조 20) 대사헌이 되고 다음 해 함경도심리사가 되어 삼수(三水) 갑산(甲山) 서수라(西水羅) 및 백두산 등지를 순찰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면서 토문강(土門江) 일대가 황무지이므로 잃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또 북병사가 경성판관을 겸하게 할 것과 함경도의 인물을 발탁해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745년에 특명으로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아버지 윤지인과 함께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다 한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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