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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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이 밀집한 거리
음식점이 밀집한 거리
식생활
개념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가게.
내용 요약

음식점은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가게이다. 음식점이 생긴 시기는, 문헌상으로 김유신이 술집에 드나든 데서 비롯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노천 음식점이 생기고 주막이 생겼다. 행상인 상품을 중개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객주집이나 여각에서도 술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조선 말 서울거리에는 모주와 비지찌개를 파는 노상 주점이 생겨났다. 1920년에는 조선호텔이 세워지고 서양식 식당도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음식점들은 사회가 산업화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최근에는 외식문화의 발달로 음식점들이 대형화·고급화되는 추세이다.

목차
정의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가게.
내용

외식산업주1 가운데서 특별히 지정되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외식시설에는 식사의 제공이 주가 되는 경우와 술 · 음료의 비율이 높은 경우가 있다. 예로부터 음식점은 이 요소가 어울려 발전하였다. 음식점이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 생겼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우리의 의식주생활의 기틀이 잡힌 때부터라고 추측된다. 문헌상으로는 김유신(金庾信)천관(天官)의 술집에 드나든 데에서 비롯된다. 지금의 기생집과 같은 곳으로, 술과 음식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또, 삼국시대부터 불교가 성하여지니 사원에서 재(齋)를 올리고 난 다음 음식을 나누어 먹는 외식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이 많이 모여서 행사하는 곳에는 노천음식점이 생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주막이 생기게 되었다. 주막을 탄막(炭幕)이라고도 한다. 시골길에 접어들면 큰길가에는 주막이 있어서 술과 밥을 팔고 잠을 재워준다. 그런데 주막은 시골길뿐만 아니라 큰 도시와 작은 고을에도 있었고, 장터 · 선착장 · 광산마을 등에도 있었다. 유명한 주막거리는 경기도 소사, 오류동, 문경새재, 경상남도 화개면, 주2의 무대인 아산 등지에 있었다.

주막은 일정한 간판이 없다. 입구에 좌판을 벌여놓고 쇠머리나 돼지발 삶은 것을 늘어놓고, 초가지붕 위로는 주3에 용수를 높이 달아놓는다. 큰 도시의 주막밀집지대에서는 주막의 이름을 손님들이 짓는다. 주막에 감나무가 있으면 감나무집, 주인의 얼굴에 검은 점이 있으면 점박이집, 주인이 욕을 잘하면 욕쟁이집 등과 같이 짓는다. 주막의 마당에는 평상이 몇 개 놓여 있고 방도 여러 개 준비되어 있어 숙식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막의 구조는 대개 아궁이 위의 솥이 주4가 앉아 있는 방이나 마루에 붙어 있어서 주파가 그대로 앉아서 술이나 국을 뜰 수 있게 되어 있다. 한 솥에는 국이 끓고 있고 또 다른 솥에서는 물이 끓고 있어서 주파는 술양푼을 연방 끓는 물에 담가 주5을 하여 술잔에 따르곤 한다.

이능화(李能和)『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는 주막의 유래를 “고려 숙종 9년(1104)에 주식점을 열어 화폐의 유통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역시 화폐가 쓰이지 않으니 여행하는 사람은 양식을 가지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또, 선조 때의 『문소만록』에 의하면 ‘호남과 영남의 큰길 가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술이나 장작이 있을 뿐이다. 여행자는 식량과 여행필수품을 말에 싣거나 등에 지고 다닌다. 명나라 장군 양호가 중국처럼 길가에 생활필수품을 파는 가게를 만들자고 권하니 수령이 명나라 군인이 지나가는 길가에 노점을 차려두었다가 그들이 지난 뒤에 거두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효종 이후부터 화폐가 점차 유통됨에 따라 음식을 팔게 되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주막은 술 · 밥 · 잠자리를 아울러 제공하는 곳이었다. 주막에서 제공하는 술은 막걸리가 주가 되고 진국을 내 놓는다. 그리고 주막에서 술 한 사발을 마시면 꼭 공짜안주 한 점이 붙는다. 마른안주로는 육포 · 어포 등이 있었고, 진안주로는 삶은 돼지고기와 주6 · 빈대떡 · 떡산적 · 생선구이 등이 있었다. 주막에서 파는 독특한 음식으로는 장국밥을 들 수 있다. 장국밥은 양지머리로 맑은 국물을 얻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이 장국밥은 서울에서 많이 먹지만 영남지방에서는 육개장을 내놓을 때가 많다. 또, 가마솥에서 삶아낸 고기 가운데서 양지머리나 쇠머리편육은 물론 혀 · 간 · 쇠꼬리 등을 안주로 삼기도 한다.

그리고 주막에서는 해장국(술국)을 끓이기도 한다. 해장국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살점을 발라낸 쇠뼈다귀를 도끼로 토막을 내어 끓는 물에 집어넣은 다음 이 국물에 된장을 알맞게 풀어서 배추우거지를 집어넣고 때로는 선지를 넣기도 하여 토막진 뼈다귀가 흐물어지게 끓이면 구수한 해장국이 된다. 전문의 장국밥집 · 육개장집 · 해장국집도 있었다. 그리고 주7이나 행상인 상품을 중개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객주집이나 여각에서도 술이나 음식을 제공하였다.

조선 말기 서울거리에는 모주(母酒)와 비지찌개를 파는 노상주점이 생겨서 가난한 사람들의 허기를 메웠다. 모주란 막걸리를 걸러낸 주8를 다시 우려낸 것이다. 그러다가 개화의 물결이 닥쳐옴에 따라 옛 주막도 점차 모습을 바꾸었다. 내외주점(內外酒店)은 주9 아낙네나 주10이 생활이 궁핍하여 직접 손님과 얼굴을 대하지 않고 술상만 차려주면 술을 마시고 돈을 상위에 얹어놓고 나가는 곳이다. 목로술집은 주11에다 안주를 늘어놓고 술을 파는 곳이다. 또, 서서 술을 들이켜고 안주 한 점 집어먹는 선술집도 생겨났으며, 여자를 고용하여 술시중을 들게 한 색주가(色酒家)도 생겼다.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의 조리사(숙수)나 기생들이 시중에 나오게 되었다. 이들을 모아서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 1909년 당시의 궁중음식관계 책임자였던 안순환(安淳煥)명월관이라는 고급요정을 차려 기생의 춤 · 노래와 더불어 궁중음식을 일반에게 내놓게 되었다. 당시 고급요리를 내놓는 집으로서 장춘관 · 식도원 · 국일관 · 고려관 · 태서관 등도 있었다. 한말에는 외국의 요리도 들어오게 되었다. 1883년 민영익(閔泳翊)이 초대주미대사로 파견되었다. 이 때 유길준(兪吉濬)도 수행하여 서양식을 비로소 맛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황제가 궁중의 한 방에 갇혀 독살을 염려하여 식사를 못하고 있을 때에 러시아공사의 처제 손탁이 직접 서양식을 만들어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은 그 뒤에 서양식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다. 고종은 손탁에게 손탁호텔을 지어주니 여기서 서양식이 상류층에 크게 보급되었다. 고종은 궁중의 서양식책임자로서 영국유학생이었던 윤기익을 앉히고, 서양식에 필요한 집기와 서양요리책도 사들였으며 프랑스에서 일류 요리사를 초빙하였다. 1920년에는 조선호텔이 세워지고 그 무렵 YMCA그릴과 일본인이 경영하던 청목당(靑木堂)이라는 서양식 식당도 생겨났다.

이미 많은 일본인이 이 땅에 들어와 있었고 마침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주12의 고급요정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여기서 일본기생과 일본요리를 내놓아 친일파들의 집회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중 화월(花月) · 화선(花仙) · 에비수 · 백수(白水) 등이 유명하였다. 또, 거리에는 일본의 우동(국수)집이나 단팥죽집들이 많이 생겨서 우리 서민들을 끌어들였다.

임오군란 직후에는 약 3,000명의 중국군인과 많은 중국서민들이 들어왔다. 이들 중국인 가운데서 부자는 무역업에 종사하였으나 대부분은 적은 자금으로 중국호떡집이나 중국국수집을 경영하였다. 호떡은 중국인 노동자나 한국의 하층서민을 위하여 만들었으나 얼마 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 받게 되었다. 둥글넓적한 밀가루반죽 속에 검은 설탕을 넣어서 구운 것이다. 또, 만두도 만들어 팔았다. 여기서 말하는 만두는 중국의 교쯔(餃子)나 파우쯔(包子)를 말하는 것이다.

음식점들은 1900년대 초기 서울의 태평로2가 · 명동 · 종로5가 · 서소문동 · 소공동 등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아직 서민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만한 새로운 음식점이 별로 없었다. 전통적인 주막이나 탕반류를 파는 음식점이 있기는 하였으나 새롭고 다양한 것을 찾게 된 입맛을 채워줄 수 없었다. 그리고 개화와 함께 도시에 생긴 고급요정이나 서양식 음식점들에 서민들이 출입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다.

중국인들은 이 때에 많은 중국국수집을 내었다. 여기서는 짜장면 · 중국우동 · 짬뽕 등을 손쉽게 만들어 내었고, 또 잡채 · 탕수육 · 튀김 · 해삼탕 · 라조기 · 란즈완쯔 같은 간단한 요리도 만들었다. 그리고 고급중국요리를 중국식 분위기에 맞추어 먹을 수 있는 고급중국요정도 생겨났다. 서울에는 아서원 · 사해루 · 금곡원 · 대관원 등이 생겼다. 이곳의 요리담당자는 거의가 중국 산둥성출신으로 제한되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음식점들은 이러한 역사를 거쳐 지금도 끊임없이 개선되고 개발되고 있다. 사회가 산업화됨에 따라 직장인들의 점심식사 해결을 위한 음식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최근의 외식문화의 발달은 음식점들을 대형화 · 고급화시키고 있는 추세이다. 프랑스 · 이탈리아 · 파키스탄 · 인도 등의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전문음식점도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외국의 외식산업체의 진출도 늘어나고 있다. 아울러 자동차의 증가로 가족이 자동차를 타고 교외에 나가서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한 패밀리레스토랑 등도 발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세시기(歲時記)』(이서구, 배영사, 1969)
『한국식품사회사』(이성우, 교문사, 1984)
「옛 주막의 민속적고찰」(배도식, 『한국민속학』 15, 1982)
「중한식문화(中韓食文化)의 교류」(이성우, 『한국식문화학회지』 4-2, 1989)
주석
주1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사람을 위한 서비스업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

조선 숙종 4년(1678)에 박두세(朴斗世)가 지은 수필집. 서울과 시골에 사는 두 양반(兩班)이 요로원(要路院) 주막에서 만나 풍속과 정치,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내용을 대화체로 엮었다. 1권. 우리말샘

주3

빨랫줄을 받치는 긴 막대기. 우리말샘

주4

술을 파는 늙은 여자. 우리말샘

주5

찬 기운을 없앨 정도로만 조금 데움. 우리말샘

주6

얄팍하게 저며 갖은양념을 하여 구운 쇠고기. 우리말샘

주7

기생이 거처하던 곳. 고려 시대에는 기생이 교방(敎坊)에 속하여 노래와 춤을 맡아보았고, 조선 시대에는 약방(藥房)에 속하여 의녀(醫女)로서 행세하거나 상방(尙房)에 속하여 침선(針線)을 담당하였으므로 방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우리말샘

주8

재강에 물을 타서 모주를 짜내고 남은 찌꺼기. 우리말샘

주9

일반 백성의 살림집. 우리말샘

주10

‘과붓집’의 높임말. 우리말샘

주11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하여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 우리말샘

주12

일본의 문화나 생활 양식을 띠고 있는 색조를 낮잡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집필자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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