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은 일제강점기 「역사교리착종담」, 「오족당봉유교론」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870년(고종 7)에 출생하여 1940년에 사망하였다. 호는 진암, 백운산인으로, 유교개혁사상가, 공교운동지도자, 금문경학자로 활동하였다. 공교가 보편성, 현실성, 진보성의 현대적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향교식 유교가 아닌 교회식 유교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교당을 지어 공자를 섬기고 성경을 번역하여 천하에 배포해야 한다는 등 구체적 포교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이병헌의 공교 운동은 유림들의 강경한 항의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1926년 이후로는 공교 사상의 경학적 기초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
이병헌의 공교사상은 1914년 북경에서 저술한 「종교철학합일론(宗敎哲學合一論)」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는 서양은 철학과 종교가 진지(眞知)와 미신으로 구별되지만, 동양의 종교인 유교는 미신을 벗어남으로써 철학과 종교를 합일시킨다고 파악한다.
유교개혁론으로서 이병헌의 공교사상은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1919)에서 체계화되었다. 또한 이병헌의 공교운동은 강한 민족의식과 결합됨으로써 유교사상과 자주적인 민족사를 결합시켜 「역사교리착종담(歷史敎理錯綜談)」(1921)과 「오족당봉유교론(吾族當奉儒敎論)」(1921)을 저술하였다.
이병헌은 공교가 보편성 · 현실성 · 진보성의 현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전통의 향교식(鄕校式) 유교가 아닌 교회식(敎會式) 유교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는 교당을 지어 공자를 섬기고 성경을 번역하여 천하에 배포하며, 교사(敎士)를 선정하여 천하에 경전을 강설하게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포교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이병헌은 그 실천으로서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지어 최초의 민립문묘(民立文廟)를 세웠다. 그리고 중국 취푸[曲阜]의 공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은 한국공교회지부를 설치하고 공교운동의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결국 이병헌의 정열적인 공교운동은 보수적인 유림들의 강경한 항의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이병헌은 금문경학의 연구와 저술에 힘써 「공경대의고(孔經大義考)」(1924) · 「시경부주삼가설고(詩經附注三家說考)」(1926) · 「서경전주금문설고(書經傳注今文說考)」(1926) · 「예경금문설고(禮經今文說考)」(1927) · 「역경금문설고易經今文說考)」(1928) 등 금문경학의 체계적 주석을 남겼다.
이병헌의 문집은 중국과 국내에서 부분적으로 인쇄 · 간행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친필 유고본으로 남아 있다. 1989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이를 『진암전서(眞菴典書)』라는 표제로 영인 · 간행하였다.
이병헌은 국가적 권위로부터 독립된 유교의 종교적 교단을 수립하고 조직화하기를 추구하였던 유교개혁사상가로서 한국유교사에 독특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또한 강유위의 금문경학을 우리나라에서 계승한 이병헌의 업적은 한국경학사에 새로운 경학 영역을 열어 주었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