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충숙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른 이진(李瑱)의 형이며, 이제현(李齊賢)의 큰아버지이다. 아들은 이부(李榑)와 이규(李樛)로 각각 사인과 헌납에 이르렀다.
1276년(충렬 2) 윤3월 우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 내수(內竪: 內僚)들이 친종행리(親從行李)의 공으로 허통(許通)되어 조정의 반열을 어지럽히는 것을 첨의부(僉議府)의 낭사(郎舍)들과 더불어 간쟁하였는데, 충렬왕이 노하여 듣지 않고 오히려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이 때 100여 인과 공모하여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려 하였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다루가치에 의하여 구금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278년 사간으로 있을 때에도 능력이나 공로가 없고 오히려 흠이 있는 사람들이 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낭사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 사의대부(司議大夫) 백문절(白文節)·김서(金㥠), 전서(典書) 최수황(崔守璜)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1280년 3월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에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첨의부의 낭사로서 고신에 서명할 때에는 반드시 공적과 허물을 따졌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