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간성(杆城). 자는 경민(景民). 호는 자호재(自好齋). 이배근(李培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만번(李晩蕃)이고, 아버지는 이흥상(李興商)이며, 어머니는 신기(辛耆)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45년(영조 21) 장령으로 처음 부임하였다. 1750년 북청부사(北靑府使)로서 치적이 일도에서 가장 뛰어나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정언·장령을 거쳐 1753년 광주경력(廣州經歷)을 역임한 뒤 장령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곧 파직당한 뒤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1761년 재등용되어 오랫동안 장령을 지냈다.
1782년(정조 6) 장령으로서 차대(次對: 매달 여섯 차례씩 의정, 대간, 홍문관의 관원들이 대궐에 들어가 중요한 정무를 왕에게 아뢰던 일)에서 15조항의 계문(啓聞)을 올리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 왕의 명령에 응한 상소문이 이유백(李有白)의 대역부도죄 사건과 관련되어 봉조하(奉朝賀) 이최중(李最中), 그리고 그의 조카인 이의익(李義翊)과 함께 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1801년(순조 1) 복관(復官)되었으며, 흩어져 유배되었던 자들도 석방되었다. 문집으로 『자호재문집(自好齋文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