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 벼슬은 역관·사자관(寫字官)을 거쳐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에 이르렀다.
선조 때의 사자관으로 한석봉 못지않게 필법이 뛰어났으나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1588년(선조 21)에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통신사의 사자관으로 일본에 가서 공적인 사무 이외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왔다. 금석문으로 사현(沙峴)의 양호묘비(楊鎬墓碑)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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