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신천강씨의 능.
이칭
이칭
신덕왕후 정릉, 서울 정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신덕왕후|태조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 (정릉동, 정릉)
내용 요약

정릉(貞陵)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신천강씨의 능이다. 처음에는 도성 내 취현방에 조성되었으나, 1409년 지금의 위치로 천릉되었다. 1669년 신덕왕후를 종묘에 부묘하면서 정자각 등을 건립해 왕릉의 규모에 맞추었다. 사적 서울 정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신천강씨의 능.
건립 경위

1396년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는 자신의 주1으로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1396)의 정릉(貞陵)을 도성 안 취현방(聚賢坊)에 조성하였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해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고, 이듬해인 1409년 정릉은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옮겨졌다.

현재의 돌거리들을 통해 보면 이때 옮겨진 것은 장명등과 주2뿐이었다. 나머지 정릉 돌거리들은 원래 자리에 매립해 놓았다가, 1410년 주3를 흙다리에서 돌다리로 건립할 때 사용하였다. 그래서 현재 청계천 광통교에는 정릉의 주4 등 다양한 주5가 남아 있다.

한편 신덕왕후는 종묘(宗廟)에 주6가 되지 못하고, 점차 정릉에서 지내는 주7이 소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대인 1581~1583년에 신덕왕후의 부묘가 논의되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669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건의로 신덕왕후의 부묘가 이루어졌으며, 정릉을 왕릉의 규모에 맞게 보수하여 주8, 주9 등을 지었다. 다만, 돌거리는 1669년에 새로 만들지 않고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정릉 주10 기록을 보면, 다른 왕릉에 비해 난간석(欄干石)과 주11만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변천

현재 정릉의 돌거리 중 1396년의 작품은 장명등과 고석뿐이며, 주12, 주13, 주14, 주15, 주16는 16세기 후반의 양식을 보인다. 아마도 신덕왕후 부묘가 논의되었던 1581~1583년 사이에 돌거리들을 추가로 세우고 부묘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와 특징

정릉은 주17 안에 봉분이 있고 그 주변에 양석과 호석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 정면에 주18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로 망주석과 문석인, 석마가 있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碑刻), 주19이 있으며, 수복방(守僕房)은 1998년, 재실은 2002년에 복원된 것이다. 『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금석문

비각 안에는 1770년에 건립된 표석이 있는데, 앞면에 ‘조선국 신덕왕후 정릉(朝鮮國 神德王后 貞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전서(篆書)를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쓰고, 뒷면의 음기는 이최중(李最中, 1715~1784)이 썼다. 이 표석을 1899년 갈아서 ‘대한 신덕고황후 정릉(大韓 神德高皇后 貞陵)'이라고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 주20로 새겼다.

의의 및 평가

정릉은 사실상 조선에서 가장 처음 조성된 왕릉이지만, 현재는 초기의 모습이 장명등 등 일부만 남아 있으며 병풍석 등은 광통교에 있다. 현재 정릉의 돌거리는 신덕왕후가 부묘된 1669년경 제작한 것이 아니며 양식상 16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참고문헌

원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춘관통고(春官通考)』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주석
주1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    우리말샘

주2

무덤 앞의 상석을 괴는 북 모양으로 생긴 둥근 돌.    우리말샘

주3

서울특별시의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 조선 시대 태조 때에 흙으로 만들었다가 폭우로 유실되어, 태종 10년(1410)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1910년에 전차 선로 공사로 매몰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우리말샘

주4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5

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여러 가지 재료.    우리말샘

주6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    우리말샘

주7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우리말샘

주8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9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10

임금의 명(命)으로 능이나 묘를 보살피던 일.    우리말샘

주11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2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13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14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15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16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7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18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9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20

임금이 손수 글씨를 씀. 또는 그 글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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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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