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헌, 한성부우윤, 강화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휘(士輝)
긍재(肯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1년(숙종 17)
사망 연도
1737년(영조 13)
본관
임천(林川)
주요 관직
대사헌|강화유수
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헌, 한성부우윤, 강화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사휘(士輝), 호는 긍재(肯齋). 조석형(趙錫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경망(趙景望)이고, 아버지는 판서 조정만(趙正萬)이며, 어머니는 이진명(李晋命)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9년(숙종 45)에 생원시에 장원이 되었고, 1725년(영조 1)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 정언으로 기강확립을 위한 소를 올리고, 교리가 되어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729년 수찬으로 복직된 뒤, 헌납·교리·지평 등을 거쳐 이듬해 승지로 발탁되었다.

1732년 가자되어 병조참판을 지내고, 도승지가 되었을 때 그는 영조로부터 “노론과 소론의 당쟁은 실은 숙종이 죽을 무렵 신하가 군주를 선택한 데 있다(實由乎庚子 國恤之日 此頃者所謂 臣擇君者也).”고 한 수서(手書)를 받기도 하였다.

그 해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 등 노론대신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상소하여 관작을 복구하게 하였다. 이어 대사성·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에 전임하여 유생의 건복(巾服)을 청나라 제도에 따르도록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고, 이 후 다시 대사헌·대사성을 거쳐 형조참판이 되어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어 경기감사 재임 중 파직되었다. 1736년 서용되어 도승지·대사헌·한성부우윤을 지내고 강화유수가 되어 임지에서 죽었다.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성품이 당론에 치우쳐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평이 많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포암집(圃巖集)』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