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이(子以). 공조참판 조흡(趙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백운(趙伯耘)이고, 아버지는 조광보(趙光輔)이며, 어머니는 정태구(鄭泰耉)의 딸이다.
문음으로 일찍 관직에 진출하여 현감으로 있던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4년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재직시 인사의 불만으로 이조판서 송상기(宋相琦)를 헐뜯은 성천부사(成川府使) 한영휘(韓永徽)를 논핵하였다.
1716년에는 『가례원류』 사건에 얽힌 문제로 윤증(尹拯)을 배척하고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하는 소를 올려 체차(遞差: 관직이 교체된 뒤 잠시동안 다른 관직을 받지 못한 상태)되었다가 이어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되었다.
그 뒤 울산부(蔚山府)로 귀양갔으나 그 해 7월에 방면되었다. 상소 당시 만류하는 사람이 많아 결단하지 못하였으나 어머니 정씨(鄭氏)의 영향으로 소를 올렸다. 이듬해 지평(持平)으로 복직되었고, 이어 홍문록(弘文錄)에도 선발되었다.
1719년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어서는 단종복위와 김종서(金宗瑞)·황보 인(黃甫仁) 등의 신원(伸寃: 억울함을 풀어버림)에도 앞장섰으나 부교리 김운택(金雲澤)과 패초(牌招: 왕이 패를 내려 신하를 부르던 일)를 어겨 잠시 파직되었다가 곧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되었고, 이어 이조좌랑으로 옮겼다. 경종 즉위 후에도 부응교(副應敎)·교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