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

천주교
인물
조선후기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 의하여 서품을 받은 사제. 신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21년(순조 21)
사망 연도
1861년(철종 12) 6월
본관
경주(慶州)
출생지
충청남도 홍주(洪州) 다락골(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주요 관직
두번째 조선인 신부
목차
정의
조선후기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 의하여 서품을 받은 사제. 신부.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충청남도 홍주(洪州) 다락골(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출생. 아버지는 경환(京煥)이고, 어머니는 이성례(李聖禮)이다.

생애

초창기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처럼 그의 아버지도 박해를 피하여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 정착하여 산간생활을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서 독실한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836년 초 조선 입국에 성공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Maubant,R.) 신부에 의하여 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조선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 도착 1년 만에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두 사람은 1842년까지 신부수업을 받다가 갑자기 귀국길에 올랐다. 중국과 조선에 이권을 찾고 있던 프랑스는 세실(Cecille)제독으로 하여금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하게 하였다.

세실은 조선인 신학생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신학교에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자 세실은 이 계획을 포기하였고, 최양업과 김대건은 각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있었던 직후라 천주교도들에 대한 검문검색이 심하였다. 특히 사군난(私窘難)이라 불리던 사사로운 박해가 심하였던 시기라 조선입국이 여의치 못하였다.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은 입국에 성공하여 활약하다가 1846년에 순교하였다. 이 무렵 최양업은 수차례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실패한 뒤 1849년 4월 상해의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하여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에 이어 두번째 조선인 신부가 되어 그 해 12월 조선입국에 성공하였다. 유일한 조선인 신부였던 그는 천주교가 다소 묵인되던 철종연간에 매우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박해 때문에 신자들의 고백성사가 밀려 있었고, 산간의 여러 공소에서는 신부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부 수는 절대부족하였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지나치게 전교에 힘쓰다가 과로로 쓰러졌고 설상가상으로 식중독이 겹쳐 1861년 6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배론신학교에서 베르뇌(Berneux,S.F.) 주교에 의하여 거행되었다.

활동사항

초기의 두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과 그는 ‘피의 증거자(순교)’와 ‘땀의 증거자(순직)’로 지칭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2년에 걸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전교활동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활동과 업적은 그 동안 김대건의 순교에 가려 크게 조명되지 못하다가 최근에 이르러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우선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치가 있는 19통의 라틴어 편지를 남기고 있다. 또한 자기 부모의 순교사적을 비롯하여 순교에 관한 증언과 자료들을 수집하였는데, 다블뤼(Daveluy,M.N.A.) 보좌주교는 이 자료들을 자신의 비망록에 수록하였고, 교회사가 달레(Dallet,C.C.)는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1864년 목판본으로 ≪성교요리문답≫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천주성교공과> 기도서를 번역, 간행하였으며, <사향가>·<사심판가>·<공심판가> 등의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라틴어 편지에는 당시 조선사회에 대한 그의 입장과 아울러 천주교의 전파가 효율적으로 이룩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교정책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또한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 제도는 악의 근원으로 교회에서는 분열을 초래하고 국가로 볼 때는 인재등용을 제한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은 파견되기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힐 것을 주장하였고, 조선에서의 자유로운 선교를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가 획득되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프랑스정부가 조선정부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펴도록 촉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최양업신부서한집」(임충신·최석우 역주, 『한국교회사연구총서』 3, 1984)
『한국천주교회사』 중·하(샤를르 달레,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천주가사의 연구』(김진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최량업신부와 교회촌』(김옥희, 학문사, 1983)
집필자
장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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