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오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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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오광대 / 제1마당 법고탈
통영오광대 / 제1마당 법고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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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시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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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통영시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내용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통영시는 남해안 중앙에 돌출한 통영반도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도시의 성장을 배경으로 오광대가 형성, 발달하였다. 오광대의 ‘오’는 오행설(五行說)에 연유한 것이고, ‘광대’는 원래 전문적인 놀이꾼 혹은 등장인물을 의미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를 추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수를 다섯으로 하여 그 위치를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위에 맞추기도 하며, 옷 빛깔을 청·홍·흑·백·황색으로 입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영오광대는 이런 것이 없고 다섯 마당〔科場〕으로 놀기 때문에 오광대라고 부른다고 풀이하며, 거의 종교적인 의식(意識)이 없이 오락적인 놀이로 연희되고 있다. 다만 탈에 고사를 지내고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비는 기우제(祈雨祭) 행사의 하나로 논 적이 있었다는 데에서 민간신앙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오광대는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인조 때 국가에서 공개적으로 행하던 공의(公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이 폐지되자 그것을 연희하던 전문적인 놀이꾼(광대)들이 생계를 위해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공연하여 전파된 산대도감 계통극의 초기 분파로 보기도 한다.

또는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같은 농촌 가면극이나 농악대의 잡색놀이가 조선 후기 민중의식의 성장과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성립된 도시 가면극의 일종이라고 보기도 한다.

오광대의 분포지는 경상남도의 낙동강 서쪽지역으로 합천의 율지(栗旨), 의령의 신반(新反), 진주, 산청, 마산, 통영, 고성, 창원의 진동(鎭東), 김해의 가락(駕洛), 거제, 사천의 가산(駕山) 등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의 고을이거나 큰 시장 또는 배로 실어나를 정부의 곡식을 보관하는 조창(漕倉)이 있던 곳들이다.

경상남도의 각지에서 오광대를 놀기 시작한 연대와 경위는 각기 다르지만, 구전에 의하면 초계 밤마리(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의 대광대패와 의령 신반의 대광대패가 각각 놀던 오광대를 각지 사람들이 보고, 자기 고장에서 놀기 시작하였거나 다른 지방의 오광대를 보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오광대라는 명칭이 같고 극 내용이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초계 밤마리와 의령 신반의 오광대는 대광대패라는 전문 유랑 예인집단(流浪藝人集團)이 연희하던 공연물 중의 하나이고, 그 밖의 지방 오광대는 그 고장의 비전문적인 한량들이 노는 토착화된 가면극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통영오광대는 토착 가면극에 속한다.

통영시에 통제사(統制使) 영문(營門)이 설치된 뒤부터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통제사의 동헌에서 수군(水軍)에 배치된 악공(樂工)들이 매귀(埋鬼)를 치고 탈놀이를 하였는데, 양반탈·할미탈(큰어미)·각시탈(작은어미)·까마귀탈·주지탈(獅子)·비비탈(영노)·중광대탈(중매귀) 등 주로 목제가면(木製假面)을 쓰고 놀았다고 한다. 관가의 매귀가 끝나면 정월보름께까지 민가를 돌며 매귀를 쳐주었는데, 이 때에는 중광대만 악대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이 고장 사람들의 가면극인 오광대는 100여 년 전 마산의 창원오광대를 보고 와서 시작하였다고도 하고, 원래 창원구읍(지금의 창원시) 사람으로 창원오광대를 놀던 이화선(李化善)이 통영시에 이사와서 전파하였다고도 한다.

그 뒤 통영오광대는 1890년대 이화선(양반역)·서현우(徐賢宇, 양반역)·박재규(朴在奎, 말뚝이역)·이순오(李順五, 할미역)·이마치(작은어미역)·최만기(崔萬基, 문둥이역)·박무일(朴武日, 검정양반역)·조열규(趙烈圭, 비틀양반역)·백성노(홍백양반역) 등이 계원이었던 의흥계(義興契)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다음 1910년대에 장용기(張容基, 말뚝이역)가 주동이 된 난사계(蘭社契)가 이어받았는데, 계원은 박정대(朴正大, 말뚝이역)·신옥서(申玉西, 곰보양반역)·배재일(裵在日, 비틀양반역)·조열규(비틀양반역)·박인진(朴仁珍, 장구)·박석근(朴石根, 장구) 등이었다.

1920년대에는 장재봉(張在奉, 문둥이역·말뚝이역)·오정두(吳正斗, 영노역)·채구생(蔡九生, 조리중역)·김진수(金辰守, 사자역·둘째양반역) 등이 주동이 되어 춘흥계(春興契)를 조직하고 오광대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1910년경에 미륵산(彌勒山) 용화사(龍華寺) 뒤에 있는 잔디밭에서 통영오광대가 노는 것을 보고 고성오광대를 시작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송석하(宋錫夏)의 「오광대소고(五廣大小考)」(1933)에 의하면 통영오광대는 약 30년 전에 창원제(昌原制)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전 자료와 학자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에 통제사영(統制使營)에서 관속들이 놀던 탈놀이가 있었고, 이 고장 주민들의 오광대는 말기에 이와는 별도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오광대를 보고 놀았다는 창원오광대에 의하여 형성된 것 같다. 시작한 시기는 1900년대로 잡을 수 있다.

통영오광대는 거제오광대·고성오광대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연희자는 이 고장의 서민층 남자들 중에서 음악과 춤에 능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귀와 오광대를 놀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계를 조직하였다.

1920년대 이후 통영오광대 주동인물이었던 장재봉(1899∼1965)의 말에 따르면 음력 12월 20일께 의흥계 임시총회를 열고, 계원 중에서 기부금을 받아 매귀에 필요한 기물을 마련하여 정월 2일부터 14일까지 집집마다 돌며 매귀를 쳐주고 받은 기부금으로 14일 밤에 파방굿과 오광대놀이를 했다고 한다.

의흥계의 정기총회는 정월 14일 외에 봄·가을로 3월 15일과 9월 15일에 가졌는데, 이때에도 오광대를 놀았다. 4월 초 봄놀이에는 ‘사또놀음’을 곁들여 오광대를 놀았는데, 일행이 시가지를 한 바퀴 돌고 용화사 뒤 잔디밭에 가서 탈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우제 행사의 하나로도 오광대를 논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오광대는 특별한 무대를 마련하지 않고 잔디밭 같은 곳에서 논다. 뒤편 구석에 출연자가 가면과 의상을 바꾸어 입고 나올 수 있게 포장을 쳐두는 개복청(改服廳)을 설치하고, 그 앞 적당한 곳에 악사가 앉고 가운데에서 탈놀이를 하며 관객은 빙 둘러서서 구경한다. 무대의 넓이는 큰 멍석 대여섯 장 넓이였다. 조명은 놀이판 가운데 서너 곳에 장작불을 놓아서 밝힌다.

연출형태는 우리나라의 다른 가면극과 같이 춤이 주가 되며 동작과 재담〔臺詞〕과 노래〔唱〕를 곁들인다. 반주곡을 굿거리라고 범칭(汎稱)하며 네마치의 굿거리 외에 세마치·염불·타령·도드리 등 장면에 따라 곡을 바꾸어가며 연주한다.

사용하는 악기는 꽹과리·징·북·장구·호적·젓대·피리·해금 등이나 지금은 주로 타악기만 쓴다. 춤은 ‘덧뵈기춤’으로, 이것은 경상남도지방의 향토무를 모두 일컫는 이름이다. 덧뵈기춤사위가 기조가 되고 배역에 따라 그 성격을 표현하여 춤이 분화된다.

통영오광대에서 가장 특징 있는 춤은 문둥이춤으로 문둥이의 생태와 애환을 표현한다. 말뚝이춤은 동작과 도약이 크고 베김새가 힘찬 건무(健舞)이다.

장재봉은 문둥이춤과 말뚝이춤의 명수였다. 양반춤은 유연한 동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원양반을 제외한 양반의 춤은 그 희극적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어 우아한 멋보다 익살스러운 맛을 풍기고 있다.

제자각시춤과 할미춤은 남성이 추지만 배역이 여성이므로 여성무의 춤사위로 춘다. 제자각시춤은 여성무의 우아함에 맵시를 부려 교태를 보이고, 할미춤은 팔을 크게 벌리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어 외설적인 동작으로 익살스럽게 춘다. 등장인물이 모두 어울려 추는 군무는 한 대목이 끝난 뒤, 대목과 대목 혹은 마당과 마당을 연결하는 구실을 한다.

극의 줄거리는 언제나 같지만 대사는 고정되지 않아 출연자의 흥과 관객의 반응에 따라서 더 넣거나 뺀다. 원래 풍자탈 마당의 대사는 고정적인 데 비해 다른 마당의 대사는 놀이할 때마다 변화가 많다.

대사는 일상회화보다 약간 느리게 말하고, 긴 대화인 경우에는 박자와 억양을 맞추어 낭송조에 가깝게 외운다. 노래는 극의 전개에 따라 필요할 때 부르는데, 문둥탈 마당에 「자탄가」, 농창탈 마당에 「사랑가」·「아리랑」 등을 창한다.

배역은 31역인데 다음과 같다. 문둥이·말뚝이·원양반·둘째양반·홍백양반·비틀양반·곰보양반(손님탈)·검정양반(흑탈)·조리중·팔선녀(8)·영노·영노양반·할미양반(영감)·할미·제자각시(작은어미)·상좌(2)·봉사·상주(2)·포수·몽돌이(끝돌이)·사자·담비 등이다.

가면은 바가지·나무·대 등으로 만들며, 놀이 뒤에 소각하지 않고 보관한다. 그런데 1909년 화재로 오동나무 가면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음력 정월 초하루와 추석날 아침, 그리고 놀이를 시작할 때마다 가면에 간단한 고사(告祀)를 지낸다.

「통영오광대」는 각기 다른 내용의 다섯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탈놀이 앞에 사또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들놀음[野遊]의 길놀이처럼 필수적인 절차는 아니었던 것 같다.

마당과 마당 사이에 막 같은 것을 사용하여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잇따라 가면과 의상을 바꾼 출연자가 등장하면 다음 마당이 시작되는데, 대개 한 마당의 놀이가 끝나면 등장인물이 모두 어울려 군무를 춘다.

이러한 춤 대목이 마당과 마당을 구분하는 구실을 한다. 연희자들 자신은 마당의 구분에 대한 의식이 약하므로 채록자에 따라 7마당 혹은 5마당으로 채록된다. 1963년 이후 5마당으로 구분하여 놀이되고 있다. 마당에 대한 명칭도 채록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기 때문에 채록자에 따라 다르다. 현지 연희자들은 대체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자료에 따라 연희한다.

「통영오광대」 마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첫째마당(문둥탈): 문둥이가 소고를 들고 나와 춤을 추고 신세한탄을 한다. 조상들이 죄가 많아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한다. 양반 풍자와 문둥이의 비애를 표현한 것이다.

② 둘째마당(풍자탈): 다른 지방 가면극의 양반마당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반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하인 말뚝이가 첫째양반은 선대에 기생이 여덟이고, 둘째양반은 종의 자식으로 서출이고, 셋째양반은 홍(洪)가와 백(白)가 두 아비가 만들었고, 넷째양반은 어미가 부정을 타서 온 몸이 새까맣게 되었고, 다섯째양반은 어미가 부정하여 손님마마〔天然痘疫神〕가 흔적을 내었고, 여섯째양반은 중풍기가 심하여 전신이 비틀어졌고, 일곱째양반은 보살인 어미가 서방질하여 낳았다고 양반들의 근본을 폭로하며, 자기야말로 대대손손 당상벼슬의 양반이라고 호통을 하고 양반들을 능지처참할 것이지만 용서하니 돌아가라고 한다. 양반들이 목숨이라도 부지하였으니 좋다고 한다. 다른 탈놀음에 비하여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심하게 표현된다.

③ 셋째마당(영노탈): 무엇이든지 잘 잡아먹는 괴물인 영노가 양반을 아흔아홉 명 잡아먹고 마지막 너를 먹으면 득천(得天)하여 용이 된다고 하자 양반이 자기는 양반이 아니라고 하다가 결국 잡아먹힐 판이 되어 영노에게 쫓겨 퇴장한다. 영노라는 상상동물을 통하여 양반에 대한 풍자와 모욕을 가한 것이다.

④ 넷째마당(弄娼탈): 두 상좌가 제자각시(작은어미)를 두고 춤을 추다가 할미양반에게 쫓겨 퇴장한다. 할미양반과 제자각시가 통정하여 아기를 순산하고, 그 아기를 어르는 할미를 제자각시가 쓰러뜨려 죽이고 할미의 상여가 출상한다. 이것은 다른 오광대의 파계승을 풍자하는 중마당과 처첩관계로 인한 가정 비극을 표현한 영감·할미마당이 합쳐진 격이다.

⑤ 다섯째마당(포수탈): 담비는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사자는 포수의 총에 맞아 죽는다. 연희자들은 약육강식의 원리를 표현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양반보다 강한 것이 있음을 암시했다고 하나,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벽사진경(闢邪進慶)을 비는 의식무(儀式舞)인 사자탈춤이 오락적인 놀이로 종교성이 없어져서 이렇게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통영오광대보존회에서 보존·운영하고 있다. 역대 기예능보유자로는 김삼성(金三成: 큰어미·사자탈)·유동주(劉東柱: 꼭두각시·작은어미·포수·호적·조리중)·강연호(姜連浩: 큰어미·꽹쇄) 등이 있으며 1998년 현재 강영구(姜永九: 말뚝이)·이기숙(李基淑: 원양반) 등이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정상박, 집문당, 1986)
『탈춤의 역사와 원리』(조동일, 수학사, 1980)
『야유·오광대』(강용권, 형설출판사, 1977)
『한국의 민속극』(심우성, 창작과 비평사, 1975)
『한국가면극』(이두현, 한국가면극연구회, 1969)
『중요무형문화재지정자료』오광대(이두현·김천흥, 문화재관리국, 1964)
「오광대 형성에 관한 서설」(정상박, 『어문학』33, 1975)
「야유·오광대 가면극」(최상수, 『경상남도지』하, 1963)
「통영오광대 대사」(이민기, 『국어국문학』22, 1960)
「오광대소고」(송석하, 『조선민속』1, 1933)
집필자
정상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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