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장령, 이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숙예(叔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61년(영조 37)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주요 관직
응교|장령|이조참의|대사간
정의
조선 후기에, 장령, 이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숙예(叔藝). 홍중성(洪重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진보(洪鎭輔)이고, 아버지는 홍명호(洪明浩)이며, 어머니는 오명보(吳命普)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9년(정조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 해 의정부에서 실시한 예문관검열 회권(會圈: 차례로 성적을 매김.)에 선발되어 사관(史官)인 검열(檢閱)에 진출하였다. 1791년 조흘강(昭訖講)의 시험에 적간사관(摘奸史官)으로 파견되었으나 과장(科場)에서 일어난 물의로 강령현(康翎縣)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봉교(奉敎)로 승진하고, 1793년(정조 17)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으로 임명되어 교동부(喬桐府)의 기민정책에 부정 유무를 조사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추파만호(楸坡萬戶) 별겸춘추관기사관(別兼春秋館記事官)으로 임명되어 강계부사(江界府使) 이하 진장(鎭將)들의 불법을 규찰하는 동시에 외사(外史)의 임무를 다하였다.

이 해 여름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관리 선발을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서 최고의 권점을 받았고, 이어 경기의 고양(高陽)·파주(坡州)·장단(長湍)·풍덕(豊德) 어사로 파견되었다. 1797년 부교리 때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김이소(金履素), 부사 신기(申耆)와 함께 서장관의 임무를 띄고 중국에 다녀왔다.

1799년 응교를 거쳐 장령으로 재직 중 별겸춘추(別兼春秋)의 직분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옮겼고, 이 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 이조참의로 승진한 뒤 곧 대사간 등을 번갈아 맡았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뒤에는 역얼(逆孼) 홍서영(洪緖榮)을 수망(首望: 가장 높은 제1의 후보자)으로 주의(注擬: 후보자를 뽑아 왕에게 올림)했다는 탄핵을 받기도 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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