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승지, 황해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수(汝受)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7년(인조 15)
사망 연도
1688년(숙종 14)
본관
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주요 관직
부수찬|승지|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도승지
정의
조선 후기에, 승지, 황해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수(汝受).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탁(洪𩆸)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주문(洪柱文)이다. 어머니는 최육(崔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6년(현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이듬해에는 세자시강원의 겸관(兼官)으로 사관 벼슬인 대교(待敎)로 재직하면서 패초(牌招: 왕이 패를 내려 신하를 부름)를 여러 번 어겼다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이후 봉교(奉敎)를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으나, 대신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체직되었다가 다시 지평으로 복귀하였다. 1670년(현종 11)에는 사간원정언으로 옮겼다.

1672년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관리 선발을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선발되었다. 이후 경기지역 기민진휼 및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에 합당한 인재 선발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1674년 현종비의 승하로 예복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자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 대공친의 상사에 9개월 동안 입는 상복제도)을 주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평안도어사(平安道御史)로 파견되었으나 사사로운 정으로 지방관 전최(殿最 : 관리들의 근무성적에 따라 임면과 전직을 하던 제도)에 공정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체포, 정죄(定罪)되었다.

그러나 1676년(숙종 2) 연안부사(延安府使)로 파견되어서는 근무성적이 뛰어나 비단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그 뒤 현임 직책을 별로 제수받지 못한 상태에서 한직인 부사정(副司正)으로 있다가 1680년 사간원 탄핵으로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당하는 불운을 당하였다. 그러나 곧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되어 공훈 추록을 중지하도록 하는 한편, 노론 원로 송시열(宋時烈)을 따랐다.

이듬해 부수찬·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파견되었으며, 강원도관찰사 재직 때는 영월(寧越) 장릉(莊陵 : 단종의 능)의 화소(火巢) 안에 사육신(死六臣)의 창절사(彰節祠)를 개수(改修)하기도 했다. 1686년에는 승지로 근무했던 열성을 인정받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1688년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임무가 중대하다는 이유로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파견되었으며, 이어 진향사(進香使)의 임무를 띠고 청(淸)에 다녀왔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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