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광(士廣). 홍구택(洪九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응몽(洪應夢)이고, 아버지는 홍경하(洪景夏)이며, 어머니는 박사엄(朴師淹)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3년(정조 7) 정언으로 재직하면서 금란법(禁亂法)을 소란하게 시행한 장령(掌令) 김종탁(金宗鐸)을 탄핵하여 체직(遞職: 관직을 교체함.)케 하였다.
이후 병조낭관을 거쳐 1786년(정조 10)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관리 선발을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선발되어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정사 조경(趙璥), 부사 민종현(閔鍾顯)과 함께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오대조(五代祖)였던 고(故) 감사(監司) 홍명일(洪命一) 일가족이 순절(殉節)하여 척화(斥和)하였다는 정사(情私)를 내세워 사임하였다. 1789년 경원부사(慶源府使)로 파견되어 교제곡(交濟穀) 저축과 승군(僧軍)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등의 공으로 숙마(熟馬)가 하사되었다.
그 뒤 1791년 대사간을 거쳐 승지로 재직할 때에는 조총(鳥銃)의 실용을 상용화하도록 주장하였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에 파견되었다가 1791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대사간으로 복귀한 뒤 예조참판,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