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曉)」는 ‘새벽’을 뜻한다. 새를 선(線)적으로 단순화시켜 추상화하였고 맨 꼭대기에는 초승달 형상이 놓여 있는 조각이다. 송영수(宋榮洙)는 195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으로 약칭)에 「효」와 함께 「부재의 나무」를 출품한 이래 1970년에 작고할 때까지 용접조각을 지속적으로 제작한, 한국 철 용접조각의 선구자이다.
‘철조’라고도 불리는 철 용접조각은 서양에서는 1920년대부터 피카소에 의해 제작되었고, 한국에서는 6∙25전쟁 이후 서양으로부터 유입되었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석고나 돌, 나무 같은 재료를 사용해 덩어리 중심으로 제작되었지만, 철 용접기법이 조각에 도입됨으로써 공간을 정의하고 내포하는 새로운 조각이 등장하게 되었다. 새의 형상을 덩어리로 표현하지 않고 선적으로 표현한 「효」는 한국 초기 철조의 대표작이다.
송영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모교의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우리나라 조각계의 주류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석고 인물상이었고, 그 역시 김종영으로부터 사실적인 조각을 배웠다. 그러나 송영수는 일찍부터 추상조각에 관심을 갖고서 용접기법을 조각에 도입하였다. 「효」 이외에도 「핵의 공포」(1958), 「순교자」(1967), 「새」(1969) 등 여러 점의 용접조각이 있다.
송영수가 「효」를 제작할 당시인 1950년대에는 아직 한국에서 철을 생산할 수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시기 용접조각의 주재료가 된 것은 미군들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석유를 담아 왔던 드럼통이었다. 송영수는 드럼통을 직접 해체해서 용접조각을 제작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젊은 조각가들은 고철이나 철공소에서 철판 자투리를 얻어서 용접조각을 제작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철 용접조각은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을 반영하는 시대적 산물이라고 하겠다. 1950~60년대에 철 용접조각이 상당수 제작되었지만 현존 작품은 많지 않다. 송영수의 「효」는 국전에 출품되었던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