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년(세종 25) 교어부(交魚符)라는 명칭으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원형의 목제 표찰로서, 초기에는 한 면에 전자(篆字)로 ‘信符(신부)’라 쓰고 뒷면에는 압인하였으나, 후기에는 한 면에 ‘某更符驗(모경부험)’이라 쓰고 뒷면에 해당 문 이름을 새겼다.
이를 두 쪽으로 나누어 좌부는 궁중에 비치하고, 우부는 수문장들에게 교부하여 유사시 서로 맞추어보고 문을 열어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선전표신(宣傳標信: 승정원에서 왕명으로 발부하는 특수표찰)과 함께 제시해야 유효하였다.
이것들은 정문(正門: 4대문)에서 사용되는 것이었으며, 간문(間門: 4소문)에는 따로 개문표신이 사용되고, 부험은 필요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야간의 시간대[更]마다, 또 성문마다 사용되는 부험이 정해져 있었다. 부험은 문을 연 뒤에 곧 반납하고, 표신은 일이 끝난 뒤에 반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