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개천군 묵방리는 은산군과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탄광마을이다. 묘향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려 대동강에 이르는 대동강 제2단구면(段丘面) 들판에 분포하는데 특히 묵방리의 가치산(115.7m) 줄기 남쪽 기슭 평지에 약 40여 기를 비롯하여 돌무지무덤 30여 기, 기단식 돌무지무덤 20여 기 등 역사시대 무덤유적들이 함께 있다. 고인돌은 40여 기가 있는데 모두 지상에 무덤방[墓室]을 마련하였다. 고인돌과 함께 후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 산성(山城), 가마터[窯址], 야철지(冶鐵址) 등 여러 시기의 유적이 자리한다. 또한 까치산 서쪽 기슭의 남북으로 뻗은 구릉에는 암석들이 노출되어 있는데 고인돌의 석재를 떼어낸 자국들도 확인된다.
1960년 이곳 탄광지구의 철도부설공사에 따라 모두 2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 의해 발굴 정리되었다. 또한 1984년에 2차 발굴시 4기를 발굴하고 무덤구조가 잘 남아있는 2기는 원상대로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조사된 고인돌 중 구조가 확실한 것들은 대부분 얇은 타원형의 덮개돌 밑에 시신을 묻기 위해 돌로 쌓아 만든 장방형의 돌덧널[石築墓槨]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인돌은 무덤의 장축이 동서로 된 것은 뚜껑돌[上石]의 길이가 180∼330㎝ 내외이며, 남북으로 된 것은 뚜껑돌의 길이 300∼380㎝ 내외이다. 후자(後者)의 것은 보강시설(補强施設)이 있는 무덤으로 밖을 둘러싼 돌림돌[圍石]이 있고 막음돌[閉塞石] 시설은 전자(前者)의 것에 비해 더 견고하게 축조하는 등 서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무덤방[墓室]은 납작한 판돌[板石]을 쌓아 세 벽을 만들고 판돌을 쌓지 않은 동쪽이나 남쪽에는 큰 판돌을 세워 문처럼 만들었다. 바닥에는 벽체를 쌓은 것과 같은 크기의 판돌들을 1∼2벌 깐 것(24호)과 큰 판돌을 깐 것(20호)이 있다. 무덤방의 크기는 2호는 190×105∼103×20∼30㎝, 20호는 180×80×30㎝, 24호는 180×80×60㎝ 정도이다. 무덤방 둘레에는 막돌을 쌓아 보강 시설을 하고 그 바깥으로 네모서리와 가운데에 큰 돌을 세워 놓았다. 특히 30호 무덤방에서는 무덤방의 문 앞으로 널길[墓道]시설이 있어 주목된다. 무덤방 위에는 크고 두꺼운 판돌을 타원형으로 다듬어 올려놓았다.
출토된 유물은 묵방리형토기[墨房里型土器], 물고기모양[魚形] 반달돌칼[半月形石刀], 간돌검[磨製石劍],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등이 있다. 토기는 흑갈색의 간토기[磨硏土器]로 젖꼭지모양손잡이[乳狀把手]가 부착되어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묵방리형고인돌로 분류하며 뚜껑식(침촌형) 고인돌로부터 변화 발전한 것으로 본다. 껴묻거리로 나온 묵방리형 질그릇은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의 것으로 고인돌의 연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