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의 문집인 『동소유고(桐巢遺稿)』 권4에 수록되어 있다.
1731년 가을에 남하정은 산소를 이장하고 나서 두 동생과 함께 봉명리(鳳鳴里)에 묵었다. 다음날 새벽에 공암촌(孔巖村)을 지나오면서 서기(徐起)의 사당을 둘러보고 동학사(東鶴寺)를 둘러보았다. 이 때에 동학사는 퇴락하여 승려 6, 7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남하정이 친구인 정세형(鄭世衡)의 집에 이르니, 정세형이 “계룡산 정상에 오르면 신도안과 주위 산천을 다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계룡산에 오르기를 청하였다. 다음날 계룡산에 올라가니 산의 정기가 수려하고 마음의 모든 티끌을 씻어주는 듯하였다. 정상에는 암석이 많았고 주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동학사의 암자들이 푸른 석벽과 붉은 언덕 사이로 어렴풋이 비쳤다. 산 아래로 신도안의 언덕과 논밭들이 뻗어 있고, 국사봉(國師峰)·영천(靈泉)·종현(鐘峴)·봉림사(鳳林寺)·용연(龍淵) 등이 보였다. 신도안의 물은 남쪽으로 흘러 대둔산을 지나 동자산(童子山)에 이른 뒤에 신탄(新灘)의 중천(重川)·부영강(浮瀛江)·삼기강(三岐江)·금강·창강(滄江)·백마강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계룡산기행」은 계룡산에 올라가서 본 주위의 경치를 묘사하고 나서 날이 어두워져 계룡산에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적은 글이다. 글의 뒷부분에 함께 산에 올라갔던 인물들을 적었다. 그들은 정세형과 그의 아들인 정내교(鄭來僑)·정내숭(鄭來崇), 그리고 작자의 아우인 남하행(南夏行)·남하덕(南夏德)과 소년 세백(世白)이었다.
「계룡산기행」은 1731년 겨울에 쓴 것으로, 문장이 간결하고 아름다우며 기행문으로서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유려한 시적 표현으로 묘사한 주위 경관은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계룡산주변의 지명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아울러 풍물을 묘사하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