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잉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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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설치된 선혜청의 한 부서.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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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설치된 선혜청의 한 부서.

내용

선혜청 내의 잡비 조달과 지출을 담당하였다. 1759년(영조 35) 처음 설치되었으며, 담당 낭청(郎廳)과 회계원[計士]이 임명되어 있었다.

공잉은 선혜청에서 공인(貢人)들에게 공가(貢價)를 지급할 때 받는 빈 섬의 값[空石價]과 선혜 각청에서 상납미를 징수할 때 부가세로 가징하던 잉미(剩米)를 지칭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공잉(空剩)이라 하였으나 뒤에 ‘空’자를 ‘公’자로 고쳤다.

빈 섬값은 1장에 쌀 2되씩을 받았고, 잉미는 상납미 1섬에 쌀 3되씩, 1,000석마다 20석을 징수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자금은 선혜청 직원들의 봉급[月料], 그들 하인들의 수당[驅價], 서리와 하례(下隷)들의 월급[朔下] 기타 잡비로 사용되었다. 예산의 규모가 크고 남용의 폐단이 심하였기 때문에 1759년 전담관리부서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선혜 각 청은 공잉미를 공잉색으로 이송하고, 그 것을 수합하여 각 청의 운영비를 일원적으로 지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잉색을 각 청에서 윤번제로 맡았으나 1763년부터 강원청(江原廳)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 『영남청사례(嶺南廳事例)』

  • - 『강원청사례(江原廳事例)』

  • - 『만기요람(萬機要覽)』

  • - 『조선후기경제사연구(朝鮮後期經濟史硏究)』(김옥근, 서문당,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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