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곡부(曲阜). 자는 도경(道卿), 호는 도봉(道峰). 아버지는 공석철(孔錫哲),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신택렬(申宅烈)의 딸이다. 재종형 공상원(孔商源)을 스승처럼 모시고 시문을 익혔으며, 1898년 기우만(奇宇萬)을 찾아가 학문을 청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일본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되자 공자의 성령(聖靈)을 모시는 성묘(聖廟)를 집 근처에 세워 사산(泗山)이라 이름하고 제향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두문불출하고 지내다, 1918년 고종이 서거하자 망국의 백성은 예(禮)를 따르지 않고 의(義)를 따른다 하여 삼년복을 벗지 않았다.
중일전쟁 중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사당이 파괴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성토문을 지어 일본의 만행을 준열하게 꾸짖었으며, 전국 유림이 수원에 모여 성토하자 대표가 되어 성토문을 짓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후생의 강학을 위해 집 근처에 서림(書林)이라는 정사를 짓고 후학지도에 전념하였다.
그는 일본을 문장으로 토주(討誅)하는 것을 필생의 사상으로 실천하였으며, 당시 기정진(奇正鎭)과 전우(田愚) 학파 간에 논란의 쟁점이었던 이기설(理氣說)과 사서(四書)의 훈고학적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도봉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