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정(元靜), 호는 죽재(竹齋). 사인 곽지견(郭之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부사 김수돈(金守敦)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50년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552년 대동찰방 겸 수은어사(大同察訪兼搜銀御史)로 있을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심통원(沈通源)의 짐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모두 뒤져서 불살라버렸다.
이 사실이 관찰사를 통하여 조정에 보고되어 심통원이 파직당하자, 그의 보복이 두려워 미친 사람 행색으로 가장하고 소를 올리는 길로 서울을 떠났다. 그 뒤 10여 년 동안 피신하여 살았으며, 1566년 다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의 부흥을 꾀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언관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 뒤 공조·형조·예조의 좌랑과 정랑·통례원통례·성균관사성·장악원판사·사제감·종부시정·영천군수·공주목사·강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가 싸우다가 김성일이 죽고 진영이 와해되어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죽재문집(竹齋文集)』 2권 1책이 있다. 월암사(月巖祠)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