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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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
개념
서울과 지방의 관아에 소속된 관노비들이 모여 살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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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과 지방의 관아에 소속된 관노비들이 모여 살던 마을.
내용

관노비는 내노비(內奴婢: 內需司에 소속된 노비)·역노비(驛奴婢: 역이나 향교와 같은 특수기관에 소속된 노비)와 같이 공노비(公奴婢)의 한 부류이다. 관노비들은 중앙이나 지방의 관아에 대하여 노역 또는 현물에 의한 공납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독립된 가호(家戶)와 가계(家計)를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였다. 이 외거노비가 도성의 변경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형성된 것이 바로 관노촌이다.

이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 중 일부분은 공장(工匠)으로서 수공업에 종사하여 조선 전기의 관영수공업(官營手工業)의 주요 담당자가 되었다.

이들은 관으로부터 독립된 가계를 유지하는 대가로 노비공(奴婢貢)이라 하여 법이 규정한 신포(身布)를 사섬시(司贍寺)에 공납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관노비를 포함한 공노비의 수는 조선 초기에서 임진왜란 전까지 계속 증가하였다. 그 뒤 군공종량(軍功從良: 군공을 세워 천인신분을 면하는 것)·납속종량(納粟從良: 흉년과 전쟁시 곡식을 많이 바쳐 천인신분을 면하는 것) 등의 방법을 통해 상당수의 노비가 양민으로 신분상승하여 노비 수는 격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관노촌의 규모도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해 노비제가 완전히 폐지되어 관노촌이라는 성격도 거의 소멸되었다. 관노촌의 생활실태에 대해서는 1920년대의 조선총독부 취락조사 결과에 극히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면 성내리 일부가 관노촌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가구수 20호에 인구 62인으로 무녀(巫女)와 관노가 모여 살았으며, 언어·예절 등이 천박하여 일반인들과의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한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민족항일기에 이미 관노촌이라고 할 만한 특수 마을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한국사』10(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1981)
『한국사』13(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1981)
『朝鮮の聚落 中』(善生永助, 朝鮮總督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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