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제사를 계승하는 계사(繼嗣)는 적장자(嫡長者), 적손(嫡孫), 차자(次子) 이하의 아들이나 직계손자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중 아무도 없는 경우, 즉 후사가 없을 때 여손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사후봉사를 의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고려시대 이래 하나의 관습이기는 하여도 제도상의 규정은 아니었다. 이 관습은 고려시대의 상속제와 관련된 것으로서 17세기 후반 적장자의 우위 상속제와 적장자 봉사제가 확립되기까지 조선 초기에도 일반적으로 행하여졌으며, 오늘날에도 이를 시행하는 문중이 다수 있다.
외손봉사를 있게 한 고려시대의 관습은 다름 아니라 자녀균분 상속제로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 말 이래 사족(士族)의 이주양상에서도 보이듯이 대개가 처가쪽으로 옮겨가서 한마을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외손이 외조부모와 동거하는 기간이 길었던 데에서 온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15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외가와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았던 사례가 많으며,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이성동족부락(二姓同族部落)에서 두 입향조들이 외손간이거나 한 입향조의 처향(妻鄕)이었던 사실에서도 외손봉사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외손봉사의 대표적인 예를 보면 고려 문종 당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였던 황보영(黃甫穎)의 경우인데, 황보영에게 후사가 없어서 왕에게 외손인 김녹숭(金籙崇)을 후사로 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이성불양(異姓不養)의 원칙과 소목(昭穆:종묘나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의 순위가 강조되면서 외손봉사는 예(禮)가 아니라 하여 억제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외손봉사에 대한 시비도 있었는데, 명종 때에 일어났던 종린사안(宗麟事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560년(명종 15) 9월 명종의 서형(庶兄) 덕양군(德陽君), 장인 권찬(權纘)이 자식이 없어 외손자 풍산정(蘴山正) 종린이 태어났을 때부터 데려다 양육하고 사후의 제사까지 기탁하였는데, 종린 역시 권찬의 뜻을 따라 수양자(收養者)로서 참최(斬衰)의 상복을 입기를 원했지만 예법에 맞지 않아 결정하기 어렵다면서 왕에게 의논하게 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이에 대하여 사헌부는, 종린이 비록 3세 전에 권찬에게 수양되었다 하더라도 외손이 후사가 되는 일은 예론에 없으며 자기 아버지를 버리고 외할아버지의 성을 따라 참최의 상복을 입는 것은 인륜의 큰 줄기를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예조에서는 수양자로서 정의가 큰 사람은 해당하는 상복을 입는 것이고 종린의 경우 중자(衆子:맏아들 이외의 모든 아들)의 복에 해당하는 것이지 계후(繼後:양자를 얻어 뒤를 잇게 함)의 예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어떠하든 종린의 사안은 외손봉사가 예론에 없는 것이라 하여 행하지 못하게 한 하나의 사례이며, 수양자가 계후의 아들 역할은 안 되고 중자의 지위로만 인정되었음을 보여 준다. 외손봉사는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오늘날에도 명문가에서는 묘사 때 더러 행하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