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李俁) 엮음. 1책 16면. 32×23.3㎝. 첩장본(帖裝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葦滄 고서). 편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의 호를 따서 ‘관란정첩’이라 하였다.
신라의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영업(靈業), 고려의 탄연(坦然)·문공유(文公裕)·이암(李嵓)·한수(韓脩), 조선의 성석린(成石璘)·신장(申檣)·최흥효(崔興孝)·강희안(姜希顔)·박팽년(朴彭年)·안평대군(安平大君)·성임(成任)·정난종(鄭蘭宗)·성세창(成世昌)·김희수(金希壽)·김구(金絿)·성수침(成守琛)·황기로(黃耆老)·성종대왕(成宗大王)·송인(宋寅)·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 25인의 필적과 이우 자신의 발문을 포함하여 모두 26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
서체는 해서·행서·초서로 각법(刻法)이 정교하다. 이우의 『잡저록(雜著錄)』에 실린 동국명필첩하소발(東國名筆帖下小跋)과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실린 관란정첩발(觀瀾亭帖跋)의 내용이 동일하므로 『동국명필첩』이 바로 『관란정첩』이 된다. 오세창이 소장했던 고서 중에는 『관란정석각(觀瀾亭石刻)』으로 전한다.
이우의 자서전인 『백년록(百年錄)』 현종 무신조(戊申條, 1668)에는 “동국의 명필을 간행하고 송시열(宋時烈)로부터 발문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우의 발문 중 일부(日附)인 “중광적분약이즉사백(重光赤奮若夷則死魄)”은 “신축년칠월삭망간(辛丑年七月朔望間)”으로 1661년에 해당되므로 송시열로부터 발문을 받기 7년 전에 이미 초정본(初定本)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관란정첩』은 양으로 볼 때 잔편(殘篇)이나 단갈(斷碣) 중에서 몇 줄씩 모각(模刻:본떠 새김)한 것이지만, 각법이나 선택면에서 『해동명적(海東名迹)』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각첩으로 평가된다.